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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공주 Jun 16. 2024

어렸을 때는요(1)

전환장애의 씨를 말려야 할 텐데




녀석은 소아나 성인보다 청소년기에 만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의사 선생님께 받은 자료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나도 그랬다. 이번 회차는 내 어린 시절이 심리적 문제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어 기획했다. 읽는 분들에게도 도움이 되길 바란다.



(김 주의)





초등학교



어릴 적 사랑을 참 많이 받았던 나는 어딜 가든 귀여워하고 예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뽀얗고 귀여운 피지컬(?) 덕분이었을까.


유치원에 들어가면서 할머니에게 다시없을 사랑을 받았다. 그 크기가 어느 정도였냐면

그 시절을 뺀 지금 까지 받은 모든 사랑의 크기를 합쳐도 2년간 차곡차곡 쌓인 사랑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신발을 신고 거실과 소파를 오가며 미친 소처럼 뛰어다니는 아이를 우리 할머니는 한 마디도 뭐라고 하지 않으셨다.


"그냥 내비둬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하나뿐인 손녀딸. 밝고, 재밌고, 위풍당당한 할머니 덕분에 나 또한 그러한 모습으로 자라났다.


전라도에서 유서 깊은 사투리로 성대가 물들어버린 나는 고향으로 돌아와 서울 한복판에 자리 잡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나는 내 이름을 쓰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그간 행복하게 놀 줄만 알았지 다른 공부는 전혀 하지 않은 탓이었다.


그렇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완벽한 계획을 짜는 엄마 밑에서 할 줄 아는 것들을 블록처럼 차곡차곡  쌓아가기 시작했다. 기본적인 공부부터 시작해서 운동, 그림, 글쓰기, 음악처럼 다양한 분야를 시도했다. 내게 많은 걸 시켜보고 싶었던 엄마 덕에 가능했다. 운동만 해도 줄넘기, 농구, 수영, 방송 댄스 등을 배웠고, 성악을 배운다던가 독후감 쓰기 같은 활동도 빠뜨리지 않았다.


엄마의 손에 들린 가위로 텔레비전 선이 무참히 잘린(주범은 짱구) 후, 책들과도 친해졌다.


큰 책장이 방 벽을 빈틈없이 메웠고 천오백권 가량의 아동 문학을 읽었다.



수많은 해피 엔딩을 맛본 나는 학교에서 가장 긍정적인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밝은 사람이 됐다



늘 행복한 상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근심 걱정이란 내 얼굴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세상은 아름다웠다.





초등학교 5학년으로 올라갈 때 즈음에는 엄마가 집을 나갔다. 전에도 몇 번 그랬던 적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나는 엄마가 곧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아빠와 크게 싸워도 늘 그래왔으니까. 하지만 엄마는 며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반의 모범이 되었던 한 초등학생의 이미지는 급격히 무너져 내렸다.


항상 100점과 90점 대를 웃돌던 점수가 보란 듯이 50점대로 떨어졌다. 다림질로 늘 빳빳했던 옷매무새가 후줄근해졌고 담임 선생님의 칭찬만 받던 나는 처음으로 요상한 눈초리를 받았다. 씻는 걸 무척 귀찮아했던 터라 일주일 동안 머리를 감지 않고 학교에 간 적도 있었는데(? 물론 지금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담임 선생님도 그 사실을 알았던 것 같다.



처음으로 왕따도 당했다



나를 대하는 친구들의 행동이 어딘가 차가워진 기분이 들었다. 모든 게 그렇듯 시작은 별 게 아니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 하다가 나중에는 '뭔가 무섭다'라고 느낄 만큼 명확해졌다. 그것은 지금까지 느낀 두려움과는 종류가 달랐다. 짙고 서늘한 공기가 나를 세밀하게 옥죄는 느낌이었다.



'애들이 날 피한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는 일화가 있다. 당시 난 준비물을 자주 놓고 다녔는데, 이전까지는 엄마가 알아서 챙겨줬기 때문이었다.


교과서를 놓고 온 나는 친구 책상에 조심스럽게 다가가 쭈그려 앉아 책상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책을 같이 볼 수 없겠느냐고 미세한 목소리로 애걸했다. 나를 내려다보는 친구의 얼굴에는 난처함이 드리워졌다. 생애 처음 친구를 향한, 거절에 대한, 강력한 두려움을 느꼈다. 나는 자리로 돌아와 공허한 마음으로 앉았다. 방금 본 아이는 내가 좋아하던 친구임을 인식하면서.


친구가 몹시 중요했던 난 이 사건을 기점으로 주변 친구들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왕따 사건의 충격은 물 흐르듯 넘어갔다. 워낙 어릴 때라 잊어버리다시피 하고 6학년으로 올라간 것 같다(물론 작지 않은 흉터로 무의식에 남았지만).


6학년은 별 탈 없이 재밌게 지나갔다. 내 성향에 맞는 친구들이 다수 있었다. 반 여자애들 대부분이 뛰는 걸 좋아하는 건 큰 행운이었다.


친분을 맺는 방식으로는 같이 뛰어놀고 장난을 치는 행동을 선호했다. 그래서 유독 애들과 모여 대화를 나눈 기억이 뚜렷하지 않다. 어쩌다 수다를 떨어도 친구들이 웃고 떠드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말로 소통하는 면에 있어서 사회성이 떨어졌던 것 같다



그래도 투명하고 순수한 정신으로 초등학교를 졸업한 나다. 졸업 사진을 보면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환하게도 웃고 있다.


이때까지는 몰랐다. 어떤 시련이 폭풍우처럼 다가오게 될지.





아름다운 지옥, 중학교



때는 2011년, 차갑고 썰렁한 강당에서 입학식을 마친 후 들어간 중학교. 그곳을 생각하면 물에 젖은 나무 냄새가 난다. 서늘하고 둔탁하고 묘한 긴장감이 도는.


우리 중학교에는 노는 애들이 많았다. 전교생 절반이 그랬던 것 같다. 운 좋게도 1학년에는 그런 애들과 엮일 일이 없었다.



당시 내가 깨달았던 건 외모는 내 생각보다 엄청나고 굉장한 무언가였다는 것이다



애들은 예쁘고 잘생긴 얼굴에 관심이 많았다. 연예인 이야기, 화장품 이야기, 옷 이야기, 이성 이야기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나는 내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와 마찬가지로 그런 것들에는 하나 관심도 없었지만 그것들에 꾸준하게 노출되고 있었다. 내 얼굴이 꽤 예쁘장(? 이번 글에 물음표가 많은 건 기분 탓이다) 한 탓에 전에도 외적인 칭찬을 들었으나 중학생이 되자 그 정도가 더 짙어졌다.


나는 서서히 내가 가진 얼굴 분위기에 맞는 행동을 하려 신경을 썼다.


물론, 극도로 과한 관심을 갖지는 않았다. 아직 그럴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는.





2학년이 되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작년과는 반 분위기가 사뭇 달라 보였다. 날이 선 무언가가 공기 속에 숨어있는 듯했다.


나는 나를 포함한 친구 다섯과 함께 다녔는데, 초등학교 동창 두 명과 다른 학교에서 온 애들이었다.



안타깝게도 난 이들과 함께하며 수도 없이 많은 상처를 받는다



뭐가 문제였느냐, 모든 게 다 문제였다. 나도 문제였고, 그들도 문제였고, 주변 환경도 문제였다. 애초에 난 이들과 맞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들판 위에서 살아온 사나운 들개 같았다. 그들은 '순하지' 않았다.


두 친구 녀석들은 화장을 좋아하고, 남 얘기 하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내가 보는 앞에서 서로 귓속말로 소곤거리는 걸 즐겼다. 동창이었던 친구는 내가 느낀 것만큼 나와 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아이는 자신만만했던 초등학생 때와 달리 잔뜩 움츠려 눈치를 보는 내 모습을 은근히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나머지 친구와도 안 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난 무리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쳤다. 일분 일 초도 긴장을 풀 수 없었다. 두 명씩 팔짱을 끼고 걸으면 나는 항상 맨 뒤에서 따라가거나 세 명 이서 붙어 가기 위해 노력했다. 다 먹지도 않았는데 급식을 빨리 먹은 애들은 홀라당 나가버리기 일쑤였다(문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내가 늦게 먹는 스타일이었지만, 한 친구가 다 못 먹으면 기다리는 게 상식 아닌가. 하지만 상식과 배려 따위는 없었다. 급식을 먹을 때마다 긴장 상태에 들어갔고 밥도 반찬도 한 숟가락만 담았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유독 이해할 수 없었다



툭하면 외모를 조롱하고 헐뜯거나 날카로운 말을 하는데 그게 재밌다며 웃고 떠드는 친구들. 말이 장난이지 그건 나에게 늘 상처로 돌아왔다. 웃긴 건 그에 맞서 내가 심한 장난을 치면 애들은 단단히 화가 나거나 토라졌다는 것이다. 그럴 때면 무리 안에 속하기가 배로 힘들어졌다.


뛰어노는 것과 그림 그리는 것 외에는 아무 관심도 없던 난 사춘기 여자 친구들과 어떤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다들 재밌다고 웃을 때, 뭐가 재밌는 건지도 모른 채 상황은 지나갔다.


내가 재밌다고 느끼는 건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좀 유치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짱구 같은 거.


나는 점점 조용해졌다. 표정이 없어지고 무뚝뚝해져 갔다. 가까스로 내뱉은 말에도 차갑고 날카로운 말투가 묻어 나있었다.


언젠가 나는 내가 그렸던 만화를 무리에 있던 친구 한 명에게 보여준 적 있다. 만화를 다 읽은 친구는 예상 밖의 반응을 보였다.



"괜찮긴 한데 좀 유치해"



늘 재밌게 읽어주던 친구들의 반응과 너무 달랐다.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고, 그 이후로 더 이상 만화를 그리지 않았다.


유치한 사람이 되기 싫었다.




(다음 회차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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