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리공주 Jun 19. 2024

어렸을 때는요(2)

전환장애를 키운 것




(이전 회차와 이어집니다)





어려서부터 난 이성 친구들과 거리감이 없는 편이었다. 하지만 중학교에 올라오면서 그 편견 없던 마음은 신기루가 되어 사라져 버린다.


남자 애들은 나를 '무섭다'라고 표현했다(진짜 무서운 건 자신들인데도). 난 다른 여자애들처럼 잘 웃지 않기 때문이었다. 내 가슴에 대해 어쩌고, 내 살집에 대해 어쩌고 하는데 어떻게 웃을 수 있겠는가. 내 세계관에 있어 분하고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런데도 난 맞서지 못했다. 맞대응을 하면 그들은 자기가 한 건 까맣게 잊어버린 듯 극도로 분해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정색을 하더니 위협적인 눈빛을 쏘아댔다. 초등학교 때와는 차원이 달랐고 힘 차이가 났다.



남자 애들이 무서웠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장난이 들어와도 반응하지 않고 무시하는 것뿐이었다.





물론 남 탓만 있는 건 아니다.


나와 맞지 않는 친구들과 다닌 건 순전히 내 선택이었다. 나처럼 비교적 순한 아이들과 함께하면 해결될 문제였다. 그런 애들이 없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비굴하게 만들었다. 같이 다니는 애들이 말하는 '재치 있는 유머'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면서 이상한 신념을 만들어 마음속에 품었다.


'학교 규칙을 지키고 순한 모습을 보이는 건 찐따 같은 행동이다'


난 찐따 그 자체였고 그런 나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찐따가 되지 않기 위해 반드시 네 명의 친구들과 같이 다녀야만 했다



엄마가 자신과 같이 가자고 했을 때 친구들 옆에 남아있으려 했던 그 초등학생처럼, 난 몸도 정신도 '친구' 에게 완전히 빠져있었다.


그리고 학교에 분포되어 있는 일진들을 동경하게 되었다. 그들이 하는 행동을 따라 하고 그들이 하는 날카로운 말을 배웠다. 그럴 때마다 내가 '뭔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그 '뭔가'가 무엇인지도 모른  말이다.





엄마의 부재로 자주 아빠와 단둘이 대화를 할 기회가 생겼다. 그렇다고 해서 식탁에 마주 앉아 서로의 안부, 서로가 느끼는 감정들을 나누는 따뜻한 대화는 아니었다. 그저 아빠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들어야 하는 자리였다.


아빠는 상대와 의견이 다른 걸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람으로 보였다. 무조건 자신의 말이 옳았다. 당시 중학생이 뭘 알았겠냐만 내 나름대로의 의견을 말하면 그는 눈을 꿈뻑꿈뻑 뜨며 내가 뭔가 잘못된 사람인 것 마냥 쳐다보았다. 그럼에도 내 의견을 굽히지 않으면 대화는 필요 이상으로 과열됐고 아빠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화를 냈다.


그는 키 180센티미터가 넘는 거대한 체격의 남성이었고 아빠가 필요 이상으로 화를 내거나 날 이상한 사람으로 바라볼  중학생이었던 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내게는 끔찍이도 커 보이는 저 사람이 몹시 무서웠다. 과열된 분위기에 휩쓸려 간혹 날 손찌검 할 때면, 생존의 눈물과 잘못했다는 말을 기계처럼 반복했다.



비바람이 지나간 후에 나는 조용한 방 안에서 내가 정말 이상한 사람이 아닐까 의심했다



친구들과도 많이 다른데 아빠도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보는구나.


나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구나.


집 안에서도 말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아빠가 무슨 얘기를 하면 그냥 입을 다물고 들었다.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어떤 수업이든  내내 양쪽 귀를 모두 닫고 교과서에 낙서를 했다. 잘생긴 남자를 그리거나 예쁜 손을 그렸고, 종종 수업을 듣는 친구들의 뒷모습을 그리기도 했다. 그러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 어느새 쉬는 시간이 다가왔다. 그래서 당시에 뭘 배웠는지 기억나는 게 없.


학교를 마치면 컵라면을 먹거나 학교 옆에서 사 온 떡볶이를 즐겨 먹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들을 먹으며 컴퓨터에 빠져들었다.



그때야 말로 유일한 낙이었다



때 되면 학원에 가고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주말에는 종종 친구들이랑 놀러 나가 그들의 눈치를 보거나 하루 종일 집에서 컴퓨터 게임을 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이런 나날들이 영원할 것처럼 반복되었다.


달리기와 성취감으로 행복해하던 학생은 어디로 갔을까.





우리 반에 노는 애들 중에 특별히 신경 쓰이는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유난히 내게 친절한 관심을 주었다. 친구들이 내 외모에 대해 놀려대고 있을 때 '왜, 오리공주 예쁜데'라고 말해주는 아이였다. 그 아이는 내가 가지고 있는 걸 좋아해 줬다. 내 그림을 좋아했다.


칭찬과 인정이 부족해 극심한 마음의 굶주림을 겪던 나였기에, 그 아이가 도덕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행동을 해도 마냥 좋게 보려고 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 아이를 동경하고 좋아하게 되었다. 처음 겪는 첫사랑이란 커다란 파도와 같았고 그 감정의 크기는 너무 커서 내 머릿속을 온통 그 아이로 떠돌게 했다. 무의미한 일상에 들이닥친 변화였다.


난 그 아이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우스꽝스러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옷도  입던 내가 나름 잘 꾸미게 되고 나중에는 무리에 속하는 데 있어 부족해 보이지 않을 만큼 '성장'했다고 느꼈다.



진심으로 그 아이와 어울릴만한 위치에 서고 싶었다



언젠가 중학교 1학년 때 친했던 친구가 내게 다가와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오리야, 나는 지금의 너보다 예전의 너의 모습이 좋아'



양가적인 감정이 들었지만 가면을 벗는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것이야 말로 내 삶의 목표인 아이가 날 좋아하는 이유라 믿었고, 늘 눈치를 보던 친구들에게 재미를 줄 수 있는 이유라 믿었고, 이토록 유치하기 짝이 없는 나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집이 경매에 넘어갔다. 꼼짝없이 집 밖으로 쫓겨나야 할 상황에 닥쳐버린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갑작스러운 변화의 원흉은 할아버지에게 있었다. 집을 담보로 돈을 빌리고 갚지 못한 것이다. 주택이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에 꿀꺽 삼켜지는 동안 집안 누구도 그 상황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아빠는 집안일에 하나 관심 없었고, 엄마는 떨어져 있었으니까.



한 겨울 보일러도 틀지 않은 방 안에서 전기장판 하나에 의지했다



그 또한 하나뿐이어서 아빠는 종종 내 방에 들어와 몸을 녹였다. 도저히 가만히 앉아있지 못할 정도로 추웠는데 거기서 내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몸을 따뜻하게 해 줄 음식을 먹는 것이었다. 배가 고프지 않아도 컵라면에 물을 부었다. 뜨거운 국물을 싹 비워냈다. 그리고 전기장판을 파고 들어가 잠을 청했다.


고등학교는 엄마가 사는 부산에서 다녀야 할 예정이었다. 익숙한 고향을 떠나던 그날. 기차 안에서 나는 오로지 한 아이 생각에 잠겨있었다. 아빠랑 인사는 어떻게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집을 잃었다는 상실감도 별로 없었다.


그 후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안식처였던 서울 집을 생각한다. 반짝이는 은색 대문을 활짝 열고 자전거를 끌며 들어가던 그 마당이, 줄넘기를 뛰던 그 작은 공간이, 나는 무척이나 싫고 그립다.





과거로 돌아간다면



1. 나와 맞는 친구와 함께한다, 억지로 맞지 않는 친구 곁에 서서 나를 고문하지 않는다.



2. 다수의 웃음코드를 이해하지 못해도 그것이 내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님을 안다.



3. 내가 좋아하는 일을 다른 누군가의 말 때문에 그만두지 않는다.



4. 뛰어노는 게 좋다면, 나와 같은 친구를 찾아 같이 놀 방법을 모색한다.



5. 공부에 흥미가 없다면 다른 것 - 책 읽기나 그림 그리기 같은 - 흥미 있는 활동을 한다.



6. 나 다운 내 모습은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님을 안다.

이전 13화 어렸을 때는요(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