眞僞
행복은 인식의 결과가 아니라 접촉의 사건이다.
어제 아침, 커피를 끓이던 중 가스레인지 불꽃의 푸른 혀끝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그 작은 불꽃과 만났을 뿐이다. 참새의 바스락거림이 귀에 닿는 순간처럼, 거기에는 주체와 객체의 구분도 없고 현상과 실재의 경계도 없었다. 불꽃 자체가 곧 세계였고, 그 세계와의 만남이 곧 행복이었다. 이때 행복은 무엇인가를 '얻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크기의 철학이 아니라 밀도의 철학이다. 한 줄기 미풍이 볼을 스치는 그 순간의 온도, 찰나의 느낌이 영원과 만나는 그 지점의 밀도.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거대한 성취가 아니라 바로 이런 순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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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을 스마트폰에서 내려놓은 어느 오후, 나는 문득 옆자리 할머니의 손등에 새겨진 주름을 보았다. 그 주름 하나하나가 시간의 지층처럼 포개져 있었다. Instagram의 '행복한' 사진들이 약속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충만함이 거기에 있었다. 과시할 수도 없고 측정할 수도 없는,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어떤 깊이.
현대의 행복 산업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약속한다. 더 많은 좋아요, 더 많은 팔로워, 더 큰 성공, 더 화려한 경험. 하지만 니체가 말하는 "순간의 눈빛"은 무엇인가. 시간을 넘어선 시간, 영원 속으로 열린 찰나이다. 매 순간이 그 자체로 완결되어 있고, 매 순간이 다시 돌아와도 좋을 만큼 충만한 것. 이때 시간은 흘러가지 않고 응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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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것들이 최고의 행복에 이르게 해 준다" — 니체는 작은 것들로부터 '최고'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역설이 아니라 발견이다. 행복의 위계가 크기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발견, 아니 오히려 가장 작은 것에서 가장 큰 것이 출현한다는 발견.
언제부터 우리는 행복을 누적 가능한 무엇으로 여기게 되었을까. 언제부터 행복을 소유의 언어로만 말하게 되었을까. 행복은 소유하는 주체가 아니라, 행복 속에서 용해되는 순간이다. 참새의 바스락거림을 듣는 귀는 더 이상 '나의' 귀가 아니다. 그것은 세계가 자신을 드러내는 통로가 된다.
고요하라. 이것은 소음을 멈추라는 뜻이 아니라, 들을 수 있는 상태가 되라는 뜻이다. 알림음이 끊이지 않는 세상에서, 진정한 고요함은 어쩌면 가장 급진적인 행위일지도 모른다. 고요함은 수동성이 아니라 최고도의 능동성이다. 세계에 자신을 열어놓는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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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다시 커피를 끓이며 나는 묻는다. 과연 나는 이런 순간들을 놓치지 않을 만큼 고요해질 수 있을까. 참새와 고양이의 바스락거림을 들을 귀를 여전히 가지고 있을까. 니체가 보여주는 것은 결국 다른 종류의 주의력이다. 거대한 것들에 현혹되지 않고 미미한 것들에 마음을 기울이는 주의력. 복잡한 이론이나 거창한 체계가 아니라, 지금 여기 일어나고 있는 작은 사건들에 온전히 현존하는 주의력.
어쩌면 행복은 우리가 찾아야 할 목적지가 아니라, 우리가 이미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건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불꽃의 푸른 혀끝이 말을 걸어올 때, 우리는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행복을 위해서는, 행복해지는 데는, 얼마나 작은 것으로도 충분한가!
더할 나위 없이 작은 것, 가장 미미한 것, 가장 가벼운 것,
도마뱀의 바스락거림, 한 줄기 미풍, 찰나의 느낌, 순간의 눈빛......
이 작은 것들이 최고의 행복에 이르게 해 준다.
고요하라.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