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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수상록1 04화

무한한 거울의 방

허영의 무한성

by 조융한삶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을 떠올린다. 357개의 거울이 마주보며 만드는 무한 반사의 공간. 그 방에 서면 자신의 모습이 끝없이 복제되어 사라지는 지점까지 이어진다. 루이 14세는 이 방에서 자신의 권력을 과시했지만, 어쩌면 그는 자신조차 그 무한 반사 속에서 길을 잃었던 것이 아닐까. 거울은 현실을 반영하면서 동시에 현실을 왜곡한다. 우리는 모두 이런 거울의 방 안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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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스의 신화를 다시 읽는다.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사로잡힌 그는 결국 그 자리에서 꽃이 되어 죽었다. 허영은 자기 복제의 욕망이다. 거울 속의 나와 거울 밖의 나 사이에서 벌어지는 끝없는 경쟁. 하지만 나르시스가 사랑한 것은 정말 자신이었을까. 물에 비친 상은 이미 현실의 나와 다른 존재, 빛의 굴절로 만들어진 환상이었다. 허영은 존재하지 않는 자아를 향한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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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새벽 두 시, 나는 스마트폰을 들고 마지막으로 인스타그램을 확인했다. 오후에 올린 사진이 평소보다 적은 좋아요를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순간 느꼈던 미묘한 실망감이 내 안에 오래 머물렀다. 어둠 속에서 화면의 푸른 빛이 내 얼굴을 비추는 동안, 나는 깨달았다. 내가 올린 사진은 나의 일부가 아니라, 나를 증명하려는 끝없는 시도였다는 것을. 그 순간 나는 나르시스와 다르지 않았다. 디지털 연못에 비친 내 모습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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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의 하트 개수를 세는 우리의 손가락은 18세기 베르사유 궁정인들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다만 거울의 수가 무한대로 늘어났을 뿐이다. 스마트폰 화면은 휴대용 거울이 되었고,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자신의 반사된 모습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좋아요, 공유, 댓글—이 모든 것이 거울의 각도를 조절하는 정밀한 장치들이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의 허영은 아날로그 시대와 결정적으로 다르다. 베르사유의 거울은 고정되어 있었지만, 디지털 거울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알고리즘은 우리의 허영심을 데이터로 분석하고, 맞춤형 콘텐츠로 피드백한다. 추천 시스템은 우리의 과거 행동 패턴을 학습해 미래의 욕망을 예측한다. 이는 허영의 자동화, 욕망의 기계화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허영의 패턴을 학습하고, 그 패턴에 따라 행동한다. 마치 정밀한 거울 제작자처럼, 기술은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자신의 모습을 더욱 선명하게, 더욱 중독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지적 허영은 어떨까. 이것이야말로 가장 은밀하고 정교한 자기기만의 구조다. 철학자는 진리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동시에 진리를 발견한 자신을 사랑한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명제는 역설적이다. 자신을 아는 순간, 그 앎 자체가 새로운 자아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무지의 지를 고백하는 것조차, 어떤 의미에서는 지적 우월감의 표현일 수 있다. 겸손함을 과시하는 순간, 겸손함은 허영이 된다.


나 역시 이 글을 쓰면서 독자들이 '깊이 있는 성찰이다', '날카로운 통찰이다'라고 평가해주기를 은밀히 기대하고 있다. 허영을 비판하는 글 자체가 또 다른 허영의 대상이 되는 아이러니. 메타 비판은 메타 허영이 된다. 이것은 무한 회귀의 구조다. 러셀의 역설처럼, 모든 거짓말을 폭로하는 거짓말쟁이는 자신도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린다.


지식인들이 흔히 범하는 착각이 있다. 자신들의 욕망은 대중의 그것과 다르다고, 더 고상하다고 믿는 것. 하지만 철학자의 거울도 대중문화 소비자의 거울도 같은 인간적 욕망으로 만들어져 있다. 단지 그 욕망을 포장하는 언어가 다를 뿐이다. 학회에서 발표할 때 느끼는 긴장감, 논문이 인용될 때의 은밀한 기쁨, 책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SNS에 올릴 때의 설렘—이 모든 것이 본질적으로는 인스타그램에 셀카를 올리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이 글을 읽는 행위는 어떨까. 독서 역시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는 사회적 행위다. 어려운 책을 읽고 자랑스러워하는 것, 깊이 있는 사유에 동참했다는 흐뭇함을 느끼는 것도 결국 같은 메커니즘이다. 우리는 책을 읽을 때조차 타인의 시선을 내재화한다. '이 책을 읽는 나는 어떻게 보일까?' 읽기조차 허영이 될 수 있다. 독서는 무죄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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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키치"에 대해 말했다. 키치는 거짓된 아름다움, 자기기만적 감동이다. 우리가 고전을 읽으며 느끼는 지적 만족감도 때로는 키치가 될 수 있다. 프루스트를 읽었다는 사실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릴 때, 독서는 또 다른 거울이 된다. 쿤데라가 통찰한 것은 키치의 구조적 필연성이다. 인간은 키치 없이는 살 수 없다. 완전한 진정성이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것이 독서나 사유를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구조를 투명하게 의식하는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간다. 문제는 그 의식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크 라캉이 말했듯이, 주체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우리의 욕망은 처음부터 타자의 시선 속에서 구성된다. 허영은 이 근본적 타자성의 표현이다.


허영의 구조를 투명하게 의식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선물이다. 거울의 방에서 거울을 깨뜨리려는 시도조차 거울에 비치는 모습이 되어버리지만, 적어도 우리는 자신이 거울의 방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앎 자체가 어떤 자유를 준다. 완전한 자유는 아니지만, 적어도 무의식적 자기기만으로부터의 자유. 의식한다고 해서 허영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의식하지 않는 허영과 의식하는 허영 사이에는 윤리적 차이가 있다.


보르헤스가 그린 미로들처럼, 이 거울의 방에서도 길을 잃는 것과 길을 잃었음을 아는 것 사이에는 결정적 차이가 있다. 후자에게는 최소한 자신의 위치에 대한 인식이 있다. 『알레프』에서 보르헤스는 우주의 모든 점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지점을 발견한다. 허영을 성찰한다는 것은 그런 알레프적 순간이다. 자신의 욕망을 욕망하는 자신을 보는 것, 거울을 보는 자신을 거울에서 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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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허영을 부끄러워하지만, 동시에 그것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허영은 우리의 그림자다. 융이 말했듯이, 그림자는 자아의 일부다. 그림자를 없앨 수는 없지만, 그림자와 함께 걷는 법은 배울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림자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와 화해하는 것이다.


현대의 디지털 기술은 이 그림자를 더욱 선명하게 만들었다. 빅데이터는 우리의 무의식까지 분석한다. AI는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안다. 이제 거울은 우리의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까지 보여준다. 예측적 알고리즘은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원할지, 어떻게 행동할지를 미리 계산한다. 허영의 미래형이다.


그렇다면 이 글을 끝까지 읽은 당신과 나는 공범이 되었다. 우리는 함께 거울의 방을 탐험했고, 함께 길을 잃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안다. 길을 잃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앎이 어쩌면, 우리에게 허락된 가장 정직한 동반자 의식인지도 모른다. 함께 길을 잃은 자들끼리만 나눌 수 있는 은밀한 연대감.


파스칼은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다. 우리는 연약하지만 생각할 줄 안다. 허영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허영의 유혹에 약하지만, 그 유혹을 성찰할 줄도 안다. 파스칼이 진정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인간의 위대함이 아니라 인간의 모순이었다. 무한히 작으면서 무한히 큰 존재, 어리석으면서 동시에 지혜로운 존재. 허영도 마찬가지다. 어리석으면서 동시에 인간적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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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의 방에서 완전히 빠져나올 수는 없다. 하지만 거울들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을 수는 있다. 그것만이 정직하다. 그리고 그 정직함이, 어쩌면 우리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사랑인지도 모른다. 허영을 부끄러워하지도, 정당화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그것이 우리의 일부임을 받아들이는 것. 거울의 방에서 서로의 반사상을 바라보며, 연민의 미소를 짓는 것. 그 미소 속에는 판단이 아닌 이해가, 정죄가 아닌 포용이 있다.


결국 우리는 모두 나르시스의 후예들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나르시스에게 없었던 것이 있다. 자신이 물에 비친 환상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능력. 그 앎이 우리를 꽃으로 만들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인간으로 남을 수 있게 해준다.






허영은 사람의 마음속에 너무나도 깊이 뿌리박혀 있는 것이어서
병사도, 아래 것들도, 요리사도, 인부도 자기를 자랑하고 찬양해줄 사람들을 원한다.
심지어 철학자도 찬양자를 갖기를 원한다.
이것을 반박해서 글을 쓰는 사람들도 훌륭히 썼다는 영예를 얻고 싶어한다.
이것을 읽는 사람들은 읽었다는 영광을 얻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렇게 쓰는 나도 아마 그런 바람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을 읽을 사람들도 그럴 것이다.


팡세, 파스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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