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감자를 설탕 없이 먹는 것.
이것은 단순한 식습관의 변화가 아니라 현실과 화해하는 법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는 모든 것에 설탕을 친다. 쓴 현실에도, 지루한 일상에도, 심지어 슬픔에도. 인스타그램의 필터처럼, 모든 것을 달콤하게 포장하려 한다. 하지만 어른이 된다는 것은 삶의 날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감자의 거친 식감을, 밋밋한 맛을, 그리고 그 안에 숨어 있는 미묘한 단맛을 발견하는 것.
현대인의 불행은 너무 많은 설탕에 길들여져 있다는 것이다. 배달 앱의 달콤한 편의, 넷플릭스의 자극적인 콘텐츠, 소셜미디어의 즉각적인 승인. 우리는 기다림을 잊었고,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며, 고요함을 두려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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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영화를 보고도 혼자 불을 끄고 잠드는 것.
카프카는 『변신』에서 말했다. 불안이야말로 현대인의 존재 조건이라고. 그런데 우리는 자꾸 그 불안을 떨쳐내려 한다. 불을 켜두고, 음악을 틀고, 누군가와 통화하며.
하지만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둠과 악수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두려움을 소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함께 숨 쉬는 법을. 우리는 모두 각자의 공포 영화를 안고 산다. 미래에 대한 불안, 관계의 불확실성, 죽음의 그림자. 성숙은 이런 것들을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과 평화롭게 공존하는 법을 터득하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의 역설이 여기에 있다. 우리는 24시간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가장 고독하다. 스마트폰의 푸른 빛이 어둠을 밀어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우리를 밀어 넣는다. 진정한 용기는 그 작은 화면을 끄고 고요와 마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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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 옆 거스러미를 뜯지 않고 손톱깎이로 자르는 것.
이것은 충동과 절제 사이의 가장 원시적인 전장이다. 즉각적 해결의 쾌감과 올바른 과정의 지루함 사이에서 벌어지는 미시적 전쟁.
우리 시대는 모든 것을 즉석에서 해결하려 한다. 하루 분 배송, 10초 숏폼, 실시간 알림. 하지만 어떤 것들은 여전히 기다림을 요구한다. 손톱깎이를 찾아 서랍을 뒤지고, 조심스럽게 자르는 그 몇 초. 그 지루한 과정이 우리를 단련시킨다.
베냐민이 말한 '아우라'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기계적 복제가 불가능한, 시간과 정성이 스며든 유일무이한 경험. 거스러미를 뜯는 것은 복제 가능한 충동이지만, 손톱깎이로 자르는 것은 복제 불가능한 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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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의 디자인뿐 아니라 성분도 따지기 시작하는 것.
표면 너머를 보려는 시선의 탄생. 인스타그램 세대는 이미지에 길들여져 있다. 완벽하게 연출된 순간들, 필터링된 현실들. 하지만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 이미지가 어떤 재료로 만들어졌는지 궁금해하는 것이다.
사람에게도 성분표가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매력 뒤에 숨어 있는 진실들. 누군가의 친절함이 진정한 배려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습관적 예의에서 나온 것인지. 어른의 눈은 그런 것들을 구별해낸다.
성숙한 의식은 그 복사본들 사이에서 진짜를 찾아내는 능력을 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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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시키지 않아도 채소를 먹는 것.
자기 돌봄의 가장 쓸쓸한 형태. 어머니의 잔소리도, 의사의 권유도, 연인의 걱정도 없이. 오직 미래의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것은 시간에 대한 전혀 다른 이해다. 현재의 즐거움을 미래의 건강과 맞바꾸는 거래. 당장의 욕구를 장기적 이익과 저울질하는 계산. 하지만 그 계산 너머에는 더 깊은 사랑이 있다. 10년 후의 나를 지금의 나만큼 사랑하는 이상한 사랑.
가속화된 사회에서 이것은 일종의 저항이다. 패스트푸드의 유혹에 맞서 느린 건강을 선택하는 것. 즉각적 만족의 문화에 맞서 지연된 보상을 선택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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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나보다 남을 위해 손해를 보는 것.
자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했지만, 어쩌면 타인을 위해 기꺼이 손해 보는 순간에야 우리는 지옥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닐까.
개인주의 사회에서 이것은 이상하고 비합리적인 행동이다. 모든 것이 효율과 이익으로 계산되는 시대에, 손해를 감수하는 것은 알고리즘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하지만 바로 그 비합리성에서 인간다움이 시작된다.
레비나스의 말이 떠오른다. 타자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나는 무한한 책임을 진다. 그 책임은 계산할 수 없고, 측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무게를 받아들이는 것이 어른이 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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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어른이 된다는 것은 질문을 바꾸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더 얻을까'에서 '어떻게 더 줄까'로. '어떻게 더 빨리 갈까'에서 '어떻게 더 깊이 머물까'로. '어떻게 더 연결될까'에서 '어떻게 더 진실하게 만날까'로.
나는 아직도 가끔 거스러미를 뜯는다. 설탕을 찾기도 하고, 불을 켜두고 자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생각한다. 성장이란 완성이 아니라 방향이라는 것을.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은 도착이 아니라 여행이라는 것을.
시간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주어진다. 하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채우느냐에 따라 어떤 이는 늙기만 하고, 어떤 이는 자란다. 시간은 우리를 늙게 만들 뿐이다. 진정한 성장은 다른 곳에서 일어난다. 차이는 의식에 있다. 선택에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에 있다. 자신과 타인을 향한 정확한 사랑에.
그 사랑은 낭만적이지 않다. 때로는 쓰고, 때로는 무겁다. 하지만 그 무게를 견뎌내는 것이 어른이 되는 길이다. 설탕 없는 감자의 맛을 알아가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