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식탁에 셋이 둘러앉았다. 아이는 된장찌개에 밥을 말아달라고 했다. 먹다가 갑자기 화장실에 다녀오더니 그만 먹으면 안 되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다섯 숟가락만 더 먹어보자.” 아이는 세 숟가락까지는 먹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그러라고 했고, 아이는 약속대로 세 숟가락을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득 ‘여기까지는’이라는 표현이 우리 삶의 많은 부분에서 우리에게 깨달음을 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자기 계발서에서 목표를 잘게 쪼개는 것이 원하는 것을 이루는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목표를 얼마큼 작게 자를지를 고민하는 사이에 시간이 흐르기도 한다. 애써 세운 오늘치 목표를 달성하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다. 이럴 때 “여기까지는 가보자.”라고 말해보면 어떨까 생각해보았다.
남편이 남친이었을 때, 마닐라에서 약 6시간 떨어진 산악지방인 사가다로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트레킹을 하던 날이었다. 나는 중간에 쉬면 완주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멈추지 못했고 그는 쉬엄쉬엄 가고 싶어 했다.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다가 내가 주저앉고 말 것 같아서 정상에서 만나자고 하고 앞을 향했다. 도착해서 한두 시간쯤 기다리니 그는 검은 개 한 마리와 함께 나타났다. 혼자 걷다 쉬다를 반복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그 개가 나타나 열 계단쯤 위에 가서 그를 빤히 바라봤다고 한다. 마치 여기까지는 올라올 수 있지 않냐는 듯. 그렇게 열 계단씩 따라가다 보니 여기 도착했다고 말했다. 16년 전 일인데, 남편은 그 일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의 기억 속에 난 남친을 버리고 정상에 올라가버린 매정한 여친으로 남아있다.
엄청 바빴는데 막상 돌아보면 한 게 뭐 있나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정말 내가 해놓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지 살펴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게으름도 피웠고 딴짓도 했지만, 우리가 멈춘 그 순간까지 하고 있던 무언가가 있을 것이고, 우리가 중단한 바로 그 지점이 보일 것이다. 우리는 ‘여기까지는’ 했다. 이제 남은 건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일이다.
누군가 하는 말이 너무 거슬린다면, 잠시 숨을 고른 다음 이렇게 말할 준비를 해보면 어떨까 하고 생각을 확장해보았다. “나는 ‘여기까지는’ 괜찮지만 ‘여기부터는’ 괜찮지 않아.” 그 ‘여기’가 어디인지 알려면 그와 나눈 대화를 상기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내가 갖고 있는 감정의 패턴이나,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무례의 한계치를 점검할 수 있다. 실제로 그 사람에게 내가 준비한 말을 할 지의 여부와는 별개의 문제다. 운이 좋아 당사자에게 준비한 말을 해줄 수 있다면, 그 사람이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관계를 더 이상 할퀴는 일을 어느 정도 즈음에서 멈출 수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그룹 명상을 시작했다. ‘여기부터는’ 그룹원들이 해준 얘기다.
논문을 쓰고 있는 한 그룹원은 내가 생각한 ‘여기까지는’ 얘기를 듣더니 책상 위에 있던 종이를 들어 보여주었다. 논문을 쓰는 프로세스를 표로 정리하고, 각 단계에 걸리는 시간을 어림잡아 계산했다고 했다. 가장 작은 단위가 4시간쯤 걸린다고 했다. 하나하나 진도를 나갈 때마다, 막막했던 논문이 ‘여기까지는’ 써졌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또 다른 그룹원은 다른 관점을 제시해주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늘 ‘적당히’가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부당한 일, 감정이 상하는 말을 어디까지 참고, 어디부터 말해야 하는지, 그 미묘한 선을 찾는 것이 조직생활을 하는데 어려운 점 중 하나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얘기도 해줬다. 엄마로서, 아내로서, 직장인으로서 해야 할 일이 따로 있는데, 다 잘 해내고 싶은데, 그게 안돼 속상할 때가 많다고 했다. 이만하면 됐어(good enough)라는 말을 아무리 들어도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고 했다. 일단 시작하면 ‘여기까지는’ 해놔야 멈출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완벽주의자들이 겪고 있을 법한 얘기였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여기까지는’이 만능 주문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능 주문이 아니라면, 먹힐 만한 곳을 찾아야 한다. 누가 도움을 청했을 때, 내가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순간을 떠올려보았다. 한국에서 회사 다닐 때의 일이 생각났다. 새 전자결재시스템이 도입됐을 때, 새 홈페이지를 론칭했을 때, 무조건 나를 불러놓고, 이거 안된다고 하던 차장님이 생각났다. 난 전산실 직원도 아니고, 프로그램 개발자도 아니고, 그 차장님의 라인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덮어놓고 모른다고, 안된다고 하니 솔직히 내 업무가 바쁘지 않을 때도 도와주기 싫었다. 반면 정말 바쁜데도 도와주고 싶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여기까지는’ 해봤는데 안 돼.” 하는 사람들에게는, 기꺼이 그 화면을 같이 보면서 내가 그 시스템을 사용해 봤을 때의 기억도 더듬어보고, 매뉴얼도 찾아보고, 같이 낑낑대다가 안되면 전산실에 전화를 해주고 싶었다. 명시적인 언어가 중시되는 미국에 살면서는 이런 매너를 기본으로 장착해야만 했다. 그래야 “나도 몰라. 알아서 해”라는 성의 없는 대답을 피해 내가 알고 싶은 걸 얻어낼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서로 미루면서 기분 상한 집안일도 ‘여기까지는’ 주문을 사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다만, 상대가 내가 원하는 일을 내가 원하는 시간에 해줄 수 있는지의 여부는 부탁을 하기 전에 확인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세탁기에 빨래를 돌려놓고 아이를 데리러 나가야 할 때, 남편에게 세탁이 다 되면 빨래를 꺼내서 건조기에 넣고 돌려줄 수 있냐고 물어본다던가, 아이에게 갈아입은 옷은 아무 데나 늘어놓지 말고, 빨래 바구니에는 넣어달라고 한다던가 말이다.
집중하는 동안 누가 내게 다가왔을 때, 할 말이 있어 보일 때는 어떨까? “나 지금 ㅇㅇ하는 중인데, ‘여기까지는’ 마치고 들어도 될까?” 이렇게 말이다. 사실, 이 글을 쓰는 동안 아이가 여러 번 왔다 갔다. '여기까지' 썼으니 '여기서부터는' 잠시 미뤄둔 엄마로서의 숙제를 해결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