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쁠수록 다 태워버리는 축제, 발렌시아 '라스 빠야스'
스페인 동쪽에 위치한 발렌시아에는 유명한 것이 몇 가지 있다 : 빠에야(해산물 볶음밥), 오렌지, 그리고 불타는 축제 라스 빠야스(Las Fallas). 여기서 '라스'는 영어의 'the'를 뜻하고, 빠야스는, 첫 번째로는 불/화약이라는 의미, 두 번째로는 '거짓/가짜/허상'이라는 의미의 복합적인 의미를 가지는데, 사실 나는 두 번째 의미에 더 방점을 두고 싶다. 불이라는 것은 축제에서 신성성을 갖게 하기 위해 사용되는 기법이지만, 이 축제에서는 불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 보다는, 거짓/가짜/허상으로 만들어진 작품('Ninot')들을 불 속에 사라지게 함으로써, 그것들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극대화시키는, 일종의 일반적 축제의 고정관념적 틀을 깨는 축제이다.
이 축제의 기원은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산 호세 (성 요셉) 날인 3월 19일에 나무, 천으로 만들어진 종교적인 물건들을 태우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봄이 빨리 오길 기렸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불을 전문적으로 태우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그들은 전문 아티스트(빠예로; falleros)로 거듭났다. 후에는 이 빠예로들이 전문적인 직업으로서 인정받기 시작했고, 그들이 모여 팀 단위, 커뮤니티 단위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현재 라스 빠야스 축제는 발렌시아 문화와 사람들의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스페인 대표 축제로 자리 잡고 있다.
라스 빠야스 박물관 자료에 따르면, 1950년 전까지는 전통적인, 전형적인 발렌시아(스페인) 사람들의 얼굴 또는 모습들을 작품에 표현하는 데 집중되었다. 예를 들어 아이를 젖먹이고 있는 노파의 모습이라던지, 대장장이가 못질을 하고 있는 모습 등 사실주의에 근거한 작품들이 많았다.
그러면서 60년대에는 점점 작품에 서사가 들어가게 되고 여성의 모습이 많이 그려지기 시작하였으며 70,80년 대에는 정치 또는 민주주의 요소들이 적극 표현되었다고 한다. 90년대 이후부터는 발렌시아 지역만의 특수성이나 정체성을 드러내는 작품들이 많이 표현되었다. 2000년대부터의 작품 경향은 박물관에 없어서 개인적인 의견을 덧붙이자면, 현재의 라스 빠야스 작품들은 환상, 즐거움, 재미의 느낌을 많이 살리고 있는 것 같다. 아마 작품 규모도 100년 전보다 훨씬, 훨씬 더 크고 높아졌을 것이다. 작품들이 마치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한 장면 같달까. 참고로, 2019년 1등을 차지한 작품은 온 세계의 히어로들과 악당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작품이었다. 건담이 보였다. 남녀노소 모두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영웅'들이라는 주제가 경쟁력으로 작용한 듯하고, 무엇보다 굉장히 화려했다. 작품 전체의 서사적 느낌보다는 캐릭터들의 극적인 표정, 행동, 제스처 등이 극적 생동감을 주었다.
하루 종일 거행되는 Virgen 퍼레이드도 빼놓을 수 없다. 전통 복장을 한 남녀노소 시민들이 오후 2시부터 늦은 밤까지 꽃다발 또는 꽃가마를 들고 비르헨 광장까지 퍼레이드를 하는데, 18일 밤이 되면 비르헨 광장이 꽃으로 가득 채워진다. 이 또한 봄이 빨리 오기를 바라는 의식인 듯하다.
라스 빠야스의 하이라이트는 3월 19일에 이루어지는 라 끄레마(la crema) 의식. 작품 전체를 불태우는 의식이다. 밤 12시에 약 5-6층 건물 높이의 작품들이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이는 순간, 오들오들 떨던 관중객들은 화염의 온기를 그대로 만끽한다. 추운 새벽 공기가 라 끄레마 의식으로 인해 따뜻해지고, 그곳에 있는 전 시민이 단체 '불멍'을 때린다. 그렇게 아름다운 인형들이 불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약 15분간 바라본다. 이 만한 불구경이 없다 싶으면서도 동시에 이렇게 허무한 순간이 어디 있을까 싶다.
처음엔, 기껏 잘 만든 작품을 왜 태우냐는 반감과 궁금증이 들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불태움으로써 아름다움이 불속으로 승화되는, 혹은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아름다움을 표현한 축제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그런 아름다움 들은 한 순간에 불과하다는 허상의 판타지를 표현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아름다운 것을 유지시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가. 우리들은 아름다운 미모를 유지하기 위해, 혹은 핸드폰이나 노트북처럼 새로 산 물건들을 최대한 예쁘게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집착하는가. 그런데 발렌시아 라스 빠야스 축제는, 이러한 현대인들의 집착들이 가소롭다는 듯이, 그 해에 제일 아름답게 뽑힌 1, 2, 3등 작품들을 과감하게 불태워버린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1년 동안 공들여 만들어진 작품들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동시에 그것들이 얼마나 허상들이었는지를 극적으로 표현해주는 축제였다.
* 축제에 참여하고 싶다면... 라스 빠야스 둘러보기 팁!
- 파야스들이 배치된 장소 지도가 없어서 작품을 찾아다니기 조금 힘들 수 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발렌시아 주요 관광호텔, 숙박지 등에서 축제에 대해 잘 알 고 있기 때문에, 길을 가다가 모르겠으면 아무 호텔 로비에 들러 보자. 1등, 2등, 3등의 작품들이 설치된 장소들을 아주 친절하게 설명해 줄 것이다.
- 개인적으로 폭음 소리에 자주 깜짝깜짝 놀랐다. 약 심장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축제기간 동안 센터 중심부를 돌아다니는 것은 비추천한다. 진짜 많이 놀란다. 심지어 새벽에도 펑펑 터지기 때문에 귀마개를 끼고도 단 잠을 들기 쉽지 않으니 참고하시길.
- 파야스 박물관도 들러볼 만하다. fallero들의 박물관, 그리고 파야스 축제 주최기관의 박물관 등 축제의 역사를 알 수 있으니 참고하자. 참고로 Fallero들의 박물관은 이전 작품들의 미니 모형을, 파야스 축제 공식 박물관에서는 작품별 변천사를 알 수 있으니 참고하자.
- 파야스 기념품 자체가 살 게 없다. (발렌시아 정부에서 적극 만들어야 할 것 같다.) 그러니 발렌시아 특산물인 맛있는 오렌지 관련 상품이라도 꼭 사도록 하자.
- 개인적으로 파야스 작품(니놋)들을 만든 아티스트들과 교류할 수 있는 대화 프로그램 등을 기획하면 좋을 것 같다. (작가와의 대화) 어떤 의도로 기획, 창작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작품을 태울 때도 사람들과 함께 참여하여 절정을 느낄 수 있도록 기획되면 좋을 듯하다.
- 밤늦게까지 축제가 이어지는 만큼(불태우는 의식은 12시가 넘어서야 시작한다) 새벽까지 밖을 돌아다녀야 하므로 튼튼한 체력과 여분의 옷이 필수다. 돌아다니다가 추위로부터 몸도 녹이고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구시가지 내 (축제 메인장소와 가까운) 숙소를 잡기를 추천한다.
- 무엇보다 발렌시아는 빠에야의 고장! 나는 발렌시아의 빠에야 쿠킹클래스를 들었었다. 보통 발렌시아 빠에예로(빠에야 만드는 사람)들은, 다른 스페인 지역에서 만드는 빠에야들은 정식 빠에야가 아니라 '잡것을 섞은 밥(arroz con algo, no paella)'이라고 부를 정도로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러니 발렌시아의 빠에야를 맘껏 만끽해보자! 발렌시아에는 빵집이나 일반 테이크아웃 집에서도 빠에야를 손쉽게 '테이크아웃'할 수 있으니 참고하자.
*본 내용은 2019년 축제 기준으로 작성됨. 2020년에는 코로나 19로 인해 축제가 열리지 못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