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술학원 2년 다니고 대학에 붙었다. 고3 올라가던 겨울방학에 입시미술학원을 다니기 시작해 재수를 거쳐 목표한 학교에 들어갔다. 재학생 때는 목표한 '나군'(요즘 애들은 가군, 나군을 모르겠지) 학교를 떨어지고 '라군'의 어느 학교에 붙었는데, 내가 이 학교 가려고 그 고생했나 생각하니 350만원 넘는 등록금+입학금이 아까워 당최 등록을 할 수 없었다. 미술도 늦게 시작한 주제에, 눈만 높다며 부모님은 한사코 재수를 만류했지만, 등록 마지막날 마감시한인 오후 5시까지 방에 뭉개고 앉아있는 나를 보며 끝내 한숨을 쉬셨다. "그래. 너 알아서 해라."
그리고 재수생으로 살았던 1년은 고난과 역경의 시기였다. 처음부터 미대 입시를 반대하셨는데, 이제는 재수까지 하겠다며 고집부린 딸에게 부모님은 모질었다. 특히 이상이 높은 엄마는 1년 간 나에게 먼저 말을 건 적이 없었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재수에도 성공하지 못했으면 나를 호적에서 파버리셨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분위기에서 월 50만원에 달하는 미술학원비를 달라 할 수 없었다. 아침을 일찍 먹고 점심도시락을 싸서 동네 도서관에서 저녁까지 수능공부를 했다. 7월부터는 간신히 미술학원을 다닐 수 있었다. 엄마도 이쯤 되니, 이제와서 미술학원을 안보내면 이도저도 안되겠다 싶으셨던 것 같다. 다행히 재수만으로 나군 학교에 합격했고, 그나마 집에 붙어있을 수 있게 됐다. 엄마에겐 여전히 '그래봤자 후기 대학'에 합격했지만 나는 집에서 호적이 안 파여서 다행이었다.
그렇게 대학에 들어가니 이제는 학교에서 시간표를 주지 않고, 내 시간표를 내가 짜야 했다. 시간표를 짤 때에는 학점을 계산하고 1학년 전공필수 과목을 꼭 넣어야 한다는 걸 조교가 알려주었다. 정작 필수 과목을 넣고 보니, 내 로망이었던 교양과목은 넣을 자리가 없었다. 역사와 심리와 영화와 문화 과목을 들으며 낭만적인 대학생활을 꿈꿨던 나에게는 2학점 짜리 전공필수 '회화 실기' 과목이 일주일에 두 번, 한 번에 4시간씩 있었다. 그런 전공필수가 5개가 넘었다. 20학점을 그런 과목들로 채우니 남는 시간이 없었다. 고등학교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꽉 짜여진 시간표대로 살았다. 처음 짜는 시간표에선 점심시간을 넣지 않아 C동과 학식에서 파는 1000원짜리 김밥도 참 많이 먹었다.
그렇게 시작한 대학생활,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역대급' 에피소드가 많이 만들어졌다. 입학하고 첫 날 있었던 '회화 실기' 시간, 더럽고 추운 실기실에 둘러앉아 교수님 얼굴을 처음 보았다. 교수님은 신입인 우리에게 작가가 돼야 한다고 설파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여기 30명, 전체 1학년 80명이 앉아있고 모두 그림을 그리겠다고 하지만, 지금부터 10년 만 지나도 작가로 사는 사람은 10명도 되지 않을 거다- 라며 이제 막 대학에 들어온 미대생들의 오기를 부추겼다. 앞으로 10년 간, 사회에 나가 무슨 일을 어떻게 겪길래 작가를 포기하는 지 알 수 없지만 우리 모두 눈빛이 이글거렸다. 나는 화가라는 꿈보다는 그저 그림을 잘 그리고, 잘 하는 걸 한번 해보고 싶은 생각에 미대를 지망했던 물렁한 학생이었음에도 금방 세뇌되어 '그래 내 인생, 작가로 살자'고 다짐했다. 고작 대학교 1학년 1학기 첫 수업에서 말이다.
차차 알게 됐지만 전업 작가로 산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힘들고 고된 길이었다. 힘들기도 하지만 더 큰 원인은 그보다 재밌는 길이 더 많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오로지 그 길만을 고집스럽게 걸어 교수까지 된 사람들은 신입생들에게 '힘들지만 그 길을 견뎌 작가가 되라'고 세뇌하는 데 열중했다. 자기가 걸었던 길, 자기가 성공한 길만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전형적인 우물 안 개구리들이 그 학교 교수들이었다. 어찌되었건 세 개 반의 80여명 신입생들이 첫 시간에 모두 똑같은 강의를 들었고 그 중 상당수가 세뇌가 됐다. 오로지 지상에서 가치있는 일은 작업 뿐이라는 듯이.
내가 '지금도 잊지 못하는 에피'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그렇게 며칠 후 C반 동기가 해준 말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C반 전공실기 교수는 우리 학과에서 당시 유일한 여자 정교수이며, 나이가 중년에 접어든 아줌마 교수였다. 그 교수는 수업을 하러 들어와 학생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어둡고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는 걸 지적했다. 그러자 한 학생이 "이 전 시간에 들어온 교수님이, 너희들 작가 하기 힘들다고. 너희가 아무리 노력해도 이중 대부분이 작가로 살아남지 못할 거라 하셔서요. 그래서..."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그 우리대학 유일한 여성 정교수인 전설적인 교수는 단박에 화를 내며 쌍욕을 뱉기 시작했다.
"어떤 새끼가 첫날부터 애들 기를 죽이고 그래! 얘들아! 기죽지 마라. 나는 대학 졸업하고 바로 결혼해서 애 셋 낳고 살림만 하다 마흔부터 다시 작업해서 교수됐어. 어떤 놈이 시작도 안 한 애들한테 작가를 못할 거라 그래?! 엉?!! 너희, 나 같은 사람도 있다. 용기를 가져. 죽도록 하면 작가 될 수 있어 ! "
아줌마 교수의 쌍욕에 다들 힘이 났더랜다. 다시 분위기가 밝아지고, 그 시간이 끝난 후 동기들은 모여서 '저 교수님 멋있다'며 작가라는 꿈을 응원해준 하늘같은 교수를 우러러봤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얘기를 들은 두 학년 선배는 담배를 물고선 이렇게 말했다.
"그 교수 남편이 한국은행 총장이야."
그 순간 느꼈을 우리의 좌절감은. 읽는 분들의 상상에 맡기겠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도 그 때 생각이 다시 떠올라 새삼 좌절스러우니까. 그렇게 시작된 대학생활 4년 간, 내가 똑똑히 배운 건, '예술' 그 자체보다는 '예술 시장이 돌아가는 생리'였다. 시간과 돈이 남아돌 정도로 많으면, 그래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작업을 계속하면 유명한, 성공한 미술작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작품이 좋고 나쁘고가 문제가 아니라, 크게, 많이, 계속 똑같은 걸 하면 작가가 될 수 있다. 어차피 객관적인 평가가 불가능한 시장에서, '끊임없이 계속' 버티는 건 가장 중요한 성공요인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굉장히 많은 물적 지원이 필요했다. 그 교수 이후 미대 역사상 두번째로 여성 정교수가 된 이도 집안이 어마어마하다 했다. 집에 대형 창고가 따로 있는데, 그 창고에 우리학교 교수들 작품이 빡빡하게 차있다고. 이 사람의 엄마가, 미대 교수들이 전시를 하면 제일 먼저 달려가 모든 작품을 사들인다는 말도 들었다. 그렇게 교수들 작품을 '사드려야' 정교수로 채용될 수 있는 거였다. 돈이 있으면, 시간이 있으면 작가가 (비교적 쉽게) 될 수 있는 사회. 대학을 졸업할 즈음 나는 그 사실을 너무나 너무나 잘 아는 미대생이 되어 있었다. 돈이 없으면 얼굴이라도 예뻐야했다. 재능이 없어도 돈이 있고 계속해서 한 가지 스타일을 밀어붙이면 작가가 됐다. 계속 한다는 게 대단한 능력이긴 하지만, 그것 만으로? 진짜. 이건 아니지 않나.
그렇게 나는 '여기, 이 바닥'만 그런 줄 알고 미련 없이 그 바닥을 떠났다. 작가가 되겠단 꿈은 이전에 집어치운 지 오래였고, 작가란 직업은 나에게 더이상 반짝이지도 설렘을 주지도 않았다. 작가? 나와는 맞지 않고, 내가 할 자신도 없으며, 이제는 별로 하고 싶지도 않은 허울로 느껴졌다. 하지만 떠나오고 20년이 지난 지금은 안다. 그건 비단 미술 뿐만이 아니라는 걸. 돈과 시간만 있으면 작가 뿐 아니라 그 뭐든지 될 수 있고 그 뭐라도 할 수 있는 사회. 그게 내가 사는 사회였다. 그래서 나는 그 안에서 더이상 좌절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힘이 들고 박탈감이 될 때면 자꾸 나에게 속삭인다. "인생에서 진정 중요한 건 남들보다 얼마나 높이, 멀리 갔는지가 아니다"라고.
누구나 출발점이 다르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진짜 중요한 것, 의미있는 건 내가 처음 출발한 곳, 내가 처한 환경 안에서 내가 얼만큼 노력했고, 얼만큼 이뤄냈으며, 내가 얼만큼 열심히 임했는지라는 걸 말이다. 환경은 바꿀 수 없고 세상 모든 사람이 평등할 순 없다. 그런 건 내가 내 삶에 있어 관여할 수도, 할 부분도 아니다. 바꿀 수 없는 걸 억울하다며 불평하는 건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미술을 해온 아이들 사이에서 독하게 노력해 2년 만에 미대에 입학했다. 좋은 물감, 비싼 붓을 쓰고 매일 엄마가 운전하는 외제차를 타고 학원에 다니며, 저녁 한 끼에 만원을 아무 거리낌없이 지출하는 친구들도 있지만, 나는 그런 것 없이 오기와 끈기만으로 대학에 합격했다. 이 사실은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나를 지탱하는 가장 탄탄한 자신감이자 자부심이다. 내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가 알고 있다. 마음이 약해지고 억울한 마음이 들 때면 나를 다독인다. 내 아이가 어느정도 크면 아이에게 이 애길 해주겠다. 앞으로 더 잘난, 더 부유한 친구를 보며 수없이 좌절할 내 아이에게, 똑같이 좌절해본 엄마는 그런 시간을 이렇게 버틸 수 있었다고 비법을 전수해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