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럿이 모인 저녁 술자리에선 누구나 친구가 된다. 허물없이 속 얘길 하고, 또 그걸 듣는 사람들은 어렵지 않게 공감한다. 몇 명이 모였든 그 안에선 꼭 '대화가 잘 통한다'고 느끼는 한두 사람이 생기기 마련이고, 자리를 파할 때 즈음엔 그 한두 사람, 기분이 좋으면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과 연락처를 교환한다.
이것도 그렇게 생긴 저녁 자리에서 들은 이야기다. 그날은 인문학 강의가 있던 날로, 나는 주최자의 초대를 받아 유료강의를 무료로 들었다. 강의는 밀도있고 유려하며 재미있고 지루하지 않았다. 3시간이 넘는 강의가 끝나고, 강의에 취한 사람들이 자연스레 뒤풀이 자리에 모였다. 나는 초대해준 주최자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어 집에서 혼자 아이를 보고있는 남편에게 양해를 구하고 뒤풀이에 합류했다. 내 맞은 편엔 강연자가 앉았고, 그 분이 풀어놓는, 강의 시간에 채 다 하지 못한 뒷이야기들이 이어졌다. 맥주가 한두잔 돌면서 강연자에게 집중됐던 관심이 서로 흩어져 자기 옆자리, 혹은 앞자리 사람에게 모여들었다. 테이블은 하나였지만 대화는 서넛으로 나뉘어 각자 자리에서 맴돌았다. 어떻게 하다 이 얘기가 나왔지. 앞뒤는 생각나지 않지만 이것만은 지금도 정확하게 기억난다.
"예전에 한 진화 인류학자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 분이 하신 얘기가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사람이 부모님으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8살 이전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 진화론적 관점에서 인류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세팅이라는 거예요. 인간이 진화와 생존에 더 유리한 쪽으로, 본능적으로 세팅된 것이라 합니다.
만약 8살 이전의 기억을 모두 갖게 되면, 자기를 낳아 키워준 부모와 자기가 낳은 자식을 동시에 부양해야 할 상황이 생겼을 때 자식이 아닌 부모를 부양할 가능성이 높아져서 인류 생존에 불리해집니다. 인간이 부모에게 받은 무한한 사랑을 기억하지 못해야, 부모보다 자식을 부양하는 쪽으로 선택해요. 이미 수명이 다 한 부모보다 자식이 생존하는 쪽이 인류가 생존하는 데 더 유리하기 때문이죠."
그 말을 듣는데 왜 나는 눈물이 났다. 집에서 아빠랑 잘 놀고 있을 아이가 생각났다. 그동안 내 부모님에게 소홀했던 나에게 면죄부가 주어지는 느낌도 들었다. 말씀하신 분도 "처음 들었을 때 눈물이 났다"며 딸 생각이 났다고 했다. 이 순간에도, 나와 손주에게 하염없이 퍼주기만 하시는 부모님보다, 내가 더 주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아이 생각이 먼저 들다니. 진화인류학자들의 연구가 맞긴 맞는 걸까. 엄마도 아빠도 자신의 부모님보다 우리를 먼저 두고 사셨다. 내 머리를 열어보면 우리 엄마 아빠가 차지하는 건 1%나 될까. 우리 아이가 95%, 남편이 3%, 나머지 1%가 회사 일 정도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