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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벅이는 윤슬 Jul 29. 2022

오전 10시 전, 오후 6시 이후

해가 진 뒤와 이른 오전의 풍경에서 사찰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다


템플스테이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간을 꼽으라면 단연 오전 10시 전/오후 6시 이후다. 이는 관광객 혹은 등산객에게 유명한 사찰일수록 해당되는 부분이다. 보통 사찰에 방문객이 머무는 시간이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 전까지다. 형형색색 다양한 옷차림으로 방문객들이 사찰 곳곳을 둘러보며 사진을 찍고 소원도 비는 시간. 물론 나 또한 템플스테이가 아닌 여행길에 사찰을 방문하면 그중 한 명이 된다.

템플스테이의 큰 매력 중 하나는 그 시간밖에 있을 수 있다는 거다. 방문객들이 모두 사찰을 벗어나고 오직 사찰에 상주하거나 보살님 스님 그리고 템플스테이 참가자만 있는 시간. 들리는 소리라고는 산을 이루는 나무들이 바람에 부딪히는 소리와 처마 끝에 매달려 있는 풍경(바람에 흔들리는 종을 본 적이 있다면 그것이다) 소리, 예불 시작 전 울리는 법고 소리, 스님께서 목탁과 불경을 외는 소리뿐이다. 이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와는 다른 종류라 그 소리가 가볍고 잔잔하다. 소리의 크기를 강과 약으로만 구분한다면 오전 10시 전과 오후 6시 이후의 소리에는 강이 없다. 


이 시간에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첫 템플스테이였던 낙산사부터다. 양양 낙산사는 사찰 규모도 어마어마하게 크고 유명세도 규모에 비례해 수많은 관광객이 몰린다. 템플스테이 입소 날에도 템플스테이 사무실까지 가는 동안 여행으로 왔을 때와 별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인파가 많았다. 넉넉한 회색 바지와 조끼로 된 단체복으로 갈아입고 보살님을 따라 경내를 둘러볼 때도 어느 구역을 가든 관광객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 익숙한 풍경들을 없어진 시간이 오후 6시쯤이다. 사찰이 갖고 있던 색감의 채도가 빠지는 시간이 되면서 온전한 낙산사의 모습이 보인다. 멀리 들리는 바닷소리는 어떻게 파도가 부서지는지 상상하게 했고 드문드문 불이 켜진 법당은 홀로 기도하는 스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저녁예불 시간에는 내용은 잘 몰라도 절로 차분해지는 마음이 생겼다. 무언가를 바라지 않아도 다 괜찮은 무탈한 기분이 마음을 채운다. 아마 '힐링'이라는 단어의 뜻이 이런 걸 말하는 게 아닐까? 저녁 예불이 끝나고 9시 30분 취침 시간 전까지는 숙소 대청마루에 앉아 자연의 백색소음을 배경음악 삼아 밤하늘을 충분히 눈에 담는다. 본래 이어폰을 달고 사는 중독자라 일상의 소리를 좀처럼 듣지 않는데 사찰에 있는 동안에는 이어폰을 갈구하는 때가 없다. 그저 자연스러운 풍경과 소리에 눈과 귀를 맡긴다. 해가 올라오지 않은 시간의 사찰은 어둡지만 보이고 들리는 게 많다. 이어폰과 스마트폰이 없어도 심심하지 않은 이유다.


덕분에 새벽 예불도 점차 적응해갔다. 나름 아침형 인간이라고 생각했지만 새벽 4시 기상은 일상과 그 격차가 너무 커 낙산사에서는 새벽 예불을 듣지 못했는데, 이후에는 새벽 4시 기상도 무난하게 미션 완수하고 있다. 그 시간에 일어나는 게 괜찮다-보다는 사찰 본래의 공간을 최대한 길게 경험하고 싶기 때문인 게 더 명확한 이유다. 사찰을 채우는 선선한 산 바람이 정신을 깨워줘 생각보다 잠에서 빠르게 벗어날 수 있다. 

신기한 건 사찰에서 매번 새벽 예불을 잘 듣길래 '집에서도 부지런하게 4시에 기상해볼까'하고 호기롭게 알람을 몇 번 맞췄는데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는 거다. 일어나던 대로 6시 40분에 눈을 뜨면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이렇게 사찰 밖에서는 새벽 4시 기상이 힘들어지는 것을 보면 잔잔하고 깨끗한 사찰에 갖는 애정이 보통은 아닌 모양이다.


⌜1박 2일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풍경은 샤워까지 마치고 숙소였던 취숙헌 대청마루에 앉아 바라본 키다리 나무들의 흔들림이 아니었을까. 수많은 관광객들의 소리가 모두 빠지고 거센 파도소리와 종소리만 들리는 낙산사의 저녁 색감은 온통 흑빛이었다. 바다도 검은색 흙도 검은색 나무도 검은색. 모든 것이 그림자 같았던 공간의 한 곳에 앉아 어두움의 소리를 듣는 시간은 짧지만 강렬했다. 도시에서는 볼 수 없을 만큼 키가 컸던 나무는 검은 바람에 휘청휘청 술 취한 것처럼 흔들렸고 소리는 스스스슥- 마치 대나무 잎이 부서지는 소리 같았다. 

일출은 보기 글렀구나-아쉬움을 예고하는 소리이자 그 대신 이걸 줄게-하며 내민 풍경이었다. 그래 이 정도면 됐다. 1박 2일만에 가져가는 것치고는 이미 많이 받았어.

아이러니한 것은 많이 받았는데 가벼워졌다. 많이 덜어내고 어떤 것은 비워낸 시간이었다. 덕분에 푹 잤다.

(2020년 2월 19일 낙산사 템플스테이 후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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