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취업 준비를 하던 시절만 하더라도, 아니 어찌 보면 그때가 가장 '스펙'이라는 단어가 이슈가 되던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일정 점수 이상의 토익 성적은 기본이고, 컴퓨터활용능력이나 MS오피스와 관련된 각종 자격증도 하나 쯤은 가지고 있어야 안심을 했으며, 심지어 한자자격시험을 보는 것도 유행이었습니다. 각종 기업체나 국가에서 실시하는 공모전에서의 수상경력도 필수였지요. 그때는 인턴십이 지금처럼 활성화되어있지 않았지만, 그 이후로는 인턴십에 대한 열풍도 크게 불어서 작은 회사에서라도 인턴실습을 했던 경험 하나 쯤은 가지고 있어야 안심할 수 있는 풍조도 만들어졌습니다.
방금 열거한 스펙들은 다른 이가 아니라 제가 직접 준비하고 취득했던 스펙들입니다. 광고대행사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하는 것이 꿈이면서(네, 저는 사실 카피라이터가 꿈이었습니다!), 도대체 한자자격시험에는 왜 합격하려고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의문입니다. 물론 한자를 많이 알면 카피라이팅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실제로 카피라이터가 되고 나서 공부해도 결코 늦지 않았을텐데 말이죠. (지금은 한 집에서 부부로 살고 있는) 당시의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러 나가서 커피숍에서 깜지를 만들어가며 한자자격시험을 준비하던 그 날이 지금도 선명히 떠오르네요.
그만큼 물불 가리지 않고 스펙이라면 일단 만들어놓고 보자는 식으로, 무식하게 열심이었습니다. 취업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당시의 저를, 그리고 여전히 많은 취준생들을 스펙의 구렁텅이에 몰아넣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서 블라인드 채용 붐이 일어났습니다.
5~6년 전부터 많은 기업들이 스펙을 보지 않고 신입사원을 채용하겠다고 홍보하고 나섰습니다. 사실 직무역량에 대한 중요성은 훨씬 예전부터 이슈가 되어왔습니다. 나라에서는 2010년부터 본격적으로 국가직무능력표준(NCS: 산업현장에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요구되는 지식·기술·태도 등의 내용을 국가가 체계화한 것)에 대한 지원을 시작했고, 몇년 뒤에는 일부 대기업을 필두로 너도 나도 소위 '무스펙 전형'을 개발하여 신입사원을 채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스펙보다는 직무역량이 더욱 중요한 법인데, 과도한 스펙 경쟁의 영향으로 지원자들이 직무역량을 키우기 위해 준비하기보다는 입사 자체만을 위한 스펙을 쌓는 데에만 열중하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우려의 결과라고 보여집니다.
당시에는 저도 채용업무를 담당하고 있었고, 제가 몸담고 있는 기업에서 '스펙태클오디션(Spec-tackle Audition)'을 개발하는 과정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그 때 국내는 물론 다양한 해외 사례도 찾아보면서, 확실히 갈수록 스펙의 중요성은 떨어질 것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그 이후 무스펙 전형을 실시하는 회사도 많이 늘어났고, 최근에는 완전한 무스펙은 아니더라도 사진이나 출신지역 등 불필요한 정보는 받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무스펙 전형이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지원자들은 여전히 블라인드 채용을 100% 온전히 신뢰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겉으로는 블라인드 채용이라고 표방하면서, 내부적으로는 어떻게든 다 알아내서 스펙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가슴 속 깊이 자리잡혀 있는 듯 합니다.
이럴때 인사담당자로서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요. 물론 실제로 그러한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뉴스를 통해서 대중에게 전해진 사례도 있기 때문에, 이러한 불신과 질책을 마냥 부정할 수만은 없습니다. 하지만 몇몇 부정을 저지른 사람들로 인해서 공정하게 절차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까지 덩달아서 불신의 카테고리에 묶인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현실입니다.
간혹 오해가 있기도 합니다. 몇 년 전에 저희 회사의 신입채용 서류전형 공고가 올라가고 나서, 문의를 가장한 항의전화가 온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대동소이합니다만, 저희 회사의 서류전형은 지원자들에게 사전과제를 제시하고 이에 대한 결과물로 지원서를 대체하는 형식이었습니다. 자기소개서라든지 출신 학교나 전공을 기재하는 일체의 서류양식 없이, 사전과제 결과물로만 서류전형을 대체하는 것이었죠.
이 사전과제와 추가로 함께 제출하는 자료가 있는데, 바로 지원자들의 광고제/공모전 수상경력이나 인턴실습 경력을 증명하는 자료였습니다. 물론 이러한 자료가 없다고 지원이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경력이 있다면 제출하는 것이고, 없다면 그냥 사전과제 결과물만 제출하면 됩니다. 항의전화는 이 추가자료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스펙을 보지 않는다면서 수상경력이나 인턴실습 경력을 제출하라고 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것 아니냐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회사는 여전히 지원자의 스펙을 봅니다. 단, 필요한 것들만 봅니다.
이는 무스펙 전형이라는 표현에서 불러온 오해라고 생각합니다. 회사 입장에서 볼때, 신입사원 채용은 매우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작업입니다. 경력사원 채용은 그나마 낫습니다. 그 사람이 지금까지 쌓아 온 포트폴리오가 있고, 그 사람에 대한 동료들의 인식은 어떤지 확인해 보기 위한 평판조회 시스템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입사원은 애초에 그런 백그라운드가 없이, 서류와 면접만을 가지고 채용여부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러니 단순히 아이디어가 참신하다고, 기획력이 번뜩인다고 쉽사리 뽑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회사에 필요한 부분은 확실히 확인을 해야 뽑아야 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죠.
즉 무스펙 전형은, '아무런 스펙도 보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스펙은 굳이 보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저희 회사는 학력이나 전공, 외국어점수 등에 관한 정보는 일절 받지 않습니다. 하지만 광고에 대한 기본적인 센스는 갖추고 있는지, 광고업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는 있는지 등을 알기 위해서 수상경력이나 인턴실습 경력에 대한 정보는 받습니다. 이건 비단 저희 회사만의 기준은 아닐겁니다. 대부분의 회사가 이처럼 자사에 필요한 정보는 분명히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 무엇을 준비해야 하고 무엇은 준비할 필요가 없는지, 감이 잡히시나요? 이건 그 누구도 대신 알려줄 수 없습니다. 본인이 희망하는 회사, 본인이 희망하는 직무가 우선되어야 거기에 필요한 스펙과 불필요한 스펙이 무엇인지를 알수 있는 법이니까요. 필요한 스펙이라면 그것을 쌓기 위해서 칠전팔기로 도전하시고, 불필요한 스펙이라면 과감히 포기하세요. 선택과 집중은 언제 어디서나 통하는 전략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