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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gchic Jul 11. 2023

9년에 걸친 오픈워터 다이빙 자격증 취득기

어학연수라 쓰고 트라우마 극복 캠프로 읽는다

영어 공부를 해보겠다며 왔지만 실상 나는 세부에서 마음공부를 하고 있는 것 같다.


Light ESL수업 학생인 나는 주중엔 오전 8시부터 12시까지 4시간 1:1  영어 수업을 받고 나면 쭉 자유시간이다. 배운 것을 복습하거나 수업시간에 말하고 싶었는데 말하지 못했던 것을 찾아보고, 한국에서 가져간 교재를 대충 공부하면 오후 4시 정도. 이후 나는 수영을 하거나 헬스장에 가서 운동을 하고 저녁을 먹고 잠을 잔다.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도는 것 같아서 하루에 7시간 수업을 받는 Intensive ESL수업으로 변경을 해볼까 고민도 했지만, 혼자 공부하는 시간이 넉넉한 것도, 다른 학생들이 공부하는 시간에 여유롭게 운동하는 것도 꽤 괜찮아 그냥 과정을 유지하기로 했다. 주중에 복습과 숙제가 다 끝나니 주말은 정말 쉬는 날이다. 그래서 열심히 딴짓을 찾아본다. 주말에는 뭐 하고 놀까.


세부에서 사귄 일본인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도 즐겁지만, 영어 공부에 열중하는 그들의 시간을 뺏기는 너무 미안하다. 일본어의 영향으로 이 친구들은 생전 해보지 않은 영어 발음들을 어렵게 배우고 있는 중이고, 주말을 활용해 주중에 부족했던 공부를 채운다. 그래서 나는 혼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보고 있다. 가장 먼저 찾은 것은 스쿠버 다이빙 자격증 취득이다. 세부에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꽤 많은 다이빙샵이 있고, 여러 군데를 비교해 본 끝에 숙소에서도 멀지 않고 시설과 리뷰가 괜찮은 다이빙샵을 선택해 컨택했다.


사실 9년 전, 나는 친구와 다이빙 오픈워터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서 세부에 왔었다. 3박 4일 일정이면 쉽게 자격증을 딸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선뜻 신청했고, 황홀한 바닷속 사진을 친구에게 보여주며 함께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유했다. 격무에 지쳤던 친구도 물고기와 산호가 가득한 사진을 보며 흔쾌히 함께 가자고 응했고 그렇게 우리는 세부로 향했다. 새벽녘 세부 공항에 도착해 다이빙샵의 차를 타고 숙소에 도착. 잠을 자고 일찍이 다이빙샵으로 갔다. 이론 수업을 듣고 실습이 시작되는 순간 친구의 입술 색은 더 이상 붉은빛이 아니었다. 얕은 물속에서도 그녀는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고, 10m 정도 되는 바닷물 속에서는 후려치는 패닉으로 거의 넉다운이 된 상태였다. 나 역시 힘들어하는 친구를 보며 너무 고통스러웠다. 모든 게 다  나 때문인 것 같았고 그녀를 잃을 것 같은 공포심이 밀려왔다. 그날 오후, 숙소에 도착한 우리는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고 고민 끝에 다이빙 과정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물속은 함부로 권유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다. 남은 일정을 세부의 여러 관광지를 구경하고 맛있는 것도 먹으며 시간을 보냈지만 그때의 일은 나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었다. 공포의 감정으로 끝난 다이빙은 금기의 어떤 것으로 남았고 이후 다시는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회사가 망해서 흘러온 세부에서 나는 다시 다이빙 자격증에 도전했다. 사실 훈련일 전날까지 나는 도전할지 말지 고민이 컸다. 학원 자습실에서 인터넷을 검색하면서 수많은 후기를 살펴보고 괜찮을지 견주어봤다. 폐쇄 공포증이 있는 분의 다이빙 자격증 도전기도 샅샅이 훑어보았다. 하지만 결국 나를 움직인 건 후기나 다른 이의 체험담이 아닌 내 마음속 소리였던 것 같다. 나는 다시 뭔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계속되는 실패에 쪼그라든 스스로에게 조금이라도 바람을 불어넣고 싶었다. 그래 해보지 뭐!라는 생각이 불쑥 떠오르는 순간 신청 메시지를 보냈다. 그렇게 다시 물속으로 향했다.


다이빙샵 차를 타고 도착했다. 함께 코스를 밟는 학생들은 나를 포함해 7명. 강사님을 소개받고 이론 수업부터 다시 받았다.

“오픈워터 과정은 수심 몇 미터까지 내려갈 수 있을까요?

“18미터요.”

“어드밴스 과정 이후에는 어떤 과정이 있을까요?”

“레스큐 과정이요.”

9년 전 들은 내용이지만 어렴풋이 생각이 나 강사님이 던지는 질문에 대답을 했다. 강사님은 어떻게 알고 있냐며 되물었고, 그냥 예습을 했다고 답했다. 하마터면 실패한 경력자인 게 탄로 날 뻔했다. 바닷속 환경, 인체의 변화와 주의해야 할 점, 장비 등에 대해 꼼꼼히 설명해 주신 강사님은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덧붙였다.


‘저는 물에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이었어요. 체대 재학시절에 어쩔 수 없이 수업 중 하나로 스쿠버 다이빙 과목을 수강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물속에서 점차 편안함을 느꼈고, 바닷속 세상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이 공포심을 극복하면 그 대상을 놀라울 정도로 사랑하게 되는 것 같아요.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도 처음에는 괴롭고 힘들지 몰라요. 하지만 그 어려움을 극복해 낸다면 누구보다 물속 세상을 즐기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이 공포심을 극복하면 그 대상을 놀라울 정도로 사랑하게 된다.’
강사님의 마지막 말이 마음은 실습 내내 물에 대한 공포가 올라오는 순간 붙잡는 안전바가 되었다.


실습이 시작됐다. 가장 첫 관문은 수심 1m 수영장에서 호흡기만 끼고 물속에서 버티는 적응 훈련. 캄캄한 어둠과 입으로 내쉬고 들이마시는 답답한 숨이 나를 공포로 죄어왔다. 1차 시도는 실패. 1분을 채우지 못하고 수면 밖으로 몸을 일으키고 말았다. 강사님은 지금이 가장 어려운 훈련이라며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다시 한번 도전해 보라고 따뜻하게 말씀해 주셨다. ‘괜찮아. 살 수 있어! 호흡기도 있잖아’ 다시 한번 그렇게 입수! 이번에는 꼭 감았던 눈을 살포시 뜨고 파란 풀장 속을 둘러보았다. 열심히 버티고 있는 동료들이 보였다. 모두가 열심히 노력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길고 길었던 1분이 흘렀고 나는 첫 관문을 무사히 통과했다.


두 번째 관문은 물속에서 호흡기가 빠지거나 마스크가 벗겨졌을 때를 대비한 여러 가지 대비 훈련들. 호흡기가 빠졌을 때는 들이마신 숨을 참지 말고 자연스럽게 내뱉으면서 다시 호흡기를 입에 물고 힘차게 숨을 ‘후’ 뱉거나 마스크의 버튼을 눌러 입안에 고여 있는 물을 출수시킨다. 여기까지는 무난히 성공. 문제는 마스크를 벗었다가 다시 쓰는 대목. 마스크 안에 물이 고였을 때 빼 코로 숨을 내쉬어 출수시키는 훈련은 잘 마쳤으나, 마스크가 얼굴에서 완전히 벗겨져 코가 물에 노출되자 내 코는 원래의 신체 기능을 발동시켜 한껏 물을 들이켰다. 시야가 흐려진 상태에서 코로 물이 들어가니 정신이 혼미해졌다. 다시 마스크를 쓰고 코로 숨을 내쉬는 작업을 반복해 마스크 속 물을 빼내는 동작을 해야 하는데, 갑자기 물에 대한 공포와 답답함이 죄어왔다. 결국 1차 시도는 실패. 물은 가득 머금은 매운 코를 쥐고 일어나 버렸다. 두려움이 몸을 경직시키고 있었다.


“힘드세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괜찮지 않으신 것 같은데.. 사실 다이빙은 몸의 훈련이라기보다 정신과 마음의 훈련에 가까워요. 두려운 마음을 좀 가라앉히시고 다시 한번 해보세요. 물속이라고 다를 바 없어요. 공기는 우리 등에 있으니, 천천히 상황을 해결해 나가면 됩니다. 잘하고 계세요.”

강사님은 내 마음을 읽은 듯 차분히 상황을 설명해 주셨고,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적절한 온도로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공기는 우리 등에 있다. 다시 해볼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생겼다. 이번에는 눈을 꼭 감고 시야를 차단한 후, 감각에 집중하고 마스크를 벗었다. 천천히 촉각으로 마스크 스트랩을 찾아 다시 착용했다. 엄지와 검지로 마스크 스커트를 누르고 얼굴을 위로 향하게 한 뒤, 반복해서 코로 숨을 불어넣었다. 이 과정에서 물을 두 모금 정도 마셨지만 버틸 수 있었다. 공기는 내 등에 있다. 별일 없다. 눈을 떠보니 어느새 마스크 속 물은 모두 출수돼 있었다. 너무 기뻤다. 강사님과 동료들은 물속에서 짝짝짝 박수를 보내주었다.


마스크 벗었다 다시 쓰는 훈련은 더 깊은 수심의 수영장과 안전 수역에서도 진행됐다. 1m 풀장에서는 여차하면 몸을 일으켜 물속에서 탈출할 수 있었지만, 5m 풀장과 안전수역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잔뜩 긴장한 나를 도와준 건 이번에는 필리피노 다이빙 마스터 크리스였다. 필리피노 다이빙 마스터들은 학생 두 명 당 한 명씩 전담해 과정 내내 학생들을 보호해 주고 개인 교습도 시켜주며 바닷속에서 안전을 지켜준다. 크리스는 나와 나의 버디 지애님의 전담 마스터였는데, 다이빙하는 내내 세심하고 따뜻한 크리스 마스터님의 덕을 아주 많이 보았다. 그는 깊은 수심에서 내 어깨를 계속해서 두드리며, 할 수 있다 걱정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내주었다. 계속되는 크리스의 응원과 지지에 나는 생각보다 수월하게 마스크 클리어 훈련을 마칠 수 있었다.


이외에도 물속에서 중성부력 맞추기, 장비 벗었다가 다시 착용하기, 수신호 주고받기 등등의 훈련이 진행됐다. 처음에는 물속에서 들리는 마스크의 공기방울 소리와 입으로만 내쉬고 들이마시는 호흡이 어색하고 두렵게도 느껴졌지만 반복되는 훈련 과정에 점차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성부력에 대한 감을 익히고 오리발을 천천히 움직이며 물속을 거닐 수 있게 되는 순간부터 나는 바닷속 거대한 세상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둘째 날은 배를 타고 근교 올랑고 섬 해역에서 다이빙 수업을 받았다. 펀다이빙 겸 진행된 수업은 너무나 즐거웠다. 크리스는 흥미로운 생물체가 있는 곳들을 알려주며 사진을 찍어주었고, 나는 이곳저곳을 거닐며 아름다운 바닷속 세상을 마음껏 즐겼다. 물속에서 사람은 날 수 있었다. 공중 정원이 이런 느낌일까. 폐에 공기를 넣어 몸을 띄워보기도, 호흡을 내쉬어 몸을 가라앉혀보기도 하면서 부유하는 느낌을 만끽했다. 물속에서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총 두 번의 입수를 마치고 마침내 나는 오픈워터 자격증을 취득하게 되었다.


물속에서는 남과 대화하기 어렵기 때문에 혼자 대화하게 된다. 물속에서 내가 스스로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은 ‘괜찮아. 죽지 않아’였다. 처음에는 물에 대한 공포심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점차 내 존재에 대한 언어로 바뀌었다. ‘괜찮아. 죽지 않아’ 물 밖에서는 죽도록 안 됐던 나 자신을 향한 위로와 응원이 지상보다 더 아래인 수심 18m에 이르러서야 가능해졌다. 이제 나는 정말 괜찮고, 죽지 않을 거라는 마음을 갖게 됐다. 그리고 강사님 말처럼 나는 놀라울 정도로 물속을 갈망하고 사랑하게 됐다.


다이빙에 대한 트라우마를 극복한 것처럼 앞으로 다가올 나의 실패도 사랑할 수 있을까. 실패하는 내 모습까지도 너그럽게 끌어안고 다시 또 도전하며 나아갈 수 있을까. 오픈워터 다이빙 자격증을 손에 쥔 지금은 조금은 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 머무는 동안 어드벤스 자격증도 취득해 보기로 했다. 영어 공부를 해보겠다며 왔지만 실상 나는 세부에서 마음공부를 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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