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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향 May 12. 2023

[프롤로그] 낭만 캘리안,
길 위에 서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길을 떠났고 여전히 길 위에 머문다.

20년 차 결혼생활 파트너와의 별거로 삶의 진흙탕에서 허우적거리는 나에게 누군가 산행을 권했다. 종종거리는 매일이 일상조차 버거운 내게 온전히 긴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산행은 언감생심. 그럴 시간이 있으면 차라리 술을 마시겠다고 호기를 부렸었다 처음엔. 그렇게 한두 해가 지나고 더 이상 술로 잠을 대신할 수 없을만치 회사생활도, 나 자신도 내팽개치고픈 시간이 목까지 차오르는 시점이 되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내 지갑 깊숙한 곳에는 언제 발생할는지 모르는 상황을 위해 준비한 몇 장의 글이 면허증뒤에 부착되어 있었다.


설산의 눈이 채 녹지 않았던 그해 3월의 첫 주. 지인이 다시 내게 산행을 가자고 권유했다.  중학교 1학년 삼일절 기념일, 밑창 얇은 운동화와 바람막이 차림으로 교회 선생님들과 함께 북한산을 올랐던 나는  상상을 초월하는 추위와 얼음판 위에서  x고생을 했었었다.  그런데 일이 되려고 했는지, 그날의 기억을 되살리다 보니 왠지 산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되었다.


그렇게 어리바리하게 시작한 산행이 나에게 주는 희망과 위로에 나는 푹 빠져버렸다. 회사의 동료들과 함께 하는 매주말의 산행은 내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건강하게 해 주었고, 그 어느 때보다 활기찬 삶의 의지가 불타올랐다. 그런 열정이 가득했던 시점에 J가 내 눈에 새롭게 들어왔다.

회사업무로 알고 지낸 지 십수 년, 그와는 자주 업무로 만났지만 그가 산을 다니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음에도, 내게 그는 눈에 띄지 않는 수수한 남자였을뿐 관심밖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산에 대한 열정은 내가 그를 보는 시각을 새롭게 했고, 암벽등반을 포함해 빙벽과 거벽까지 산에 진심은 J는 나를 완전히 매료시켰다.


서글서글한 눈빛의 J.  사과를 씹으면 그런 소리가 난다, 아삭하고 새콤한.. 그의 목소리는 내가 젤로 좋아하는 과일, 사과를 닮았다고 나는 생각했다. 큰 키는 아니지만 단단한 근육으로 뭉친 상남자 그리고 암벽등반으로 단련된 우아한 몸놀림까지. 그동안 남편과의 별거로 만신창이가 되었던 게 언제냐는듯,  내 심장은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그와의 산행. 별거하던 남편과의 최후 이혼 과정도, 아이들과의 어려웠던 화해의 과정도, J가 있기에 수월했다. 아니 무모하리만치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J의 따스한 위로와 묵묵한 이해였기에 가능했었다. 그를 따라나서다 보니, 그가 하는 모든 아웃도어 활동을 함께 했었어야 하였고,  그렇게 쫓아다니다 보니 겁 많은 내가 암벽도 하게 되고,  어마어마한 고봉을 오르고, 그야말로 서당개 몇 년에 풍월을 읊게 되었던 것이다.

Red Rock Canyon, Las Vegas, NV  USA

소풍날을 오기만을 기다리는 초등학생 같은 마음으로 매주말을 기다리곤 했었다. 20마일이 넘는 대장정의 요세미티 해프돔 등반도  북미 최고봉 위트니봉 등반도, 비록 정상은 가지 못했지만 히말라야보다 더 어렵다는 시애틀의 레이니어 마운틴 등반도 흉내앴었다.  나 같은 초짜가 감히 범접할 곳이 아녔음에도 J가 이끌었기에 가능했던 모든 산행이었음은,  나도 알고 고수인 J도 안다.


그와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하이킹코스의 하나인, Budd Lake Trail에 위치한 Budd Lake, Yosemite National Park  USA

그렇게 함께 지내온 시간이 햇수로 15년째, 우리는 여전히 함께 산을 오르고 주말마다 아웃도어를 즐긴다. 쌩야전이 아니면 상대하지 않던 그가 나이가 들어 어느 정도 타협하게 되면서 몇 해 전 캠퍼밴을 구입하게 되었다.


기본적인 산행을 비롯해 스키에도 진심이고, 자전거도 진심인 그를 따라다니는 나는 늘 가랑이가 찢어진다. 스키장의 명당 주차 자리를 맡기 위해 새벽잠을 설치고, 졸린 눈을 비벼가며 그를 위해 운전을 하고, 한여름밤엔 자전거 운동을 마친 클럽멤버들을 위해 수박을 썰고, 그를 서포트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지만, J와 함께 하는 매주말의 순간은 여전히 활기차고 활력이 넘친다.  그래서일까, 싱싱한 날것의 자연 그리고 그 한가운데 머물며 삶의 의미를 찾게 되는 이 중독과 마력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


그래서 기억하고자 한다. J와의 추억들을,  대부분은 달달한 하지만 가끔은 작은 공간 탓에 씁쓰름 해지기도 하는, 사람 사는 냄새 진동하는 캠퍼를 타고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돌아치는 환갑 앞둔 철없는 나의 시간을 기억하고자 한다.  캘리 캠퍼 밴 라이프 고고씽!

 

맘모스 스키장 차 안에서 내다 뵈는 슬로프 전경, Mill's Cafe, Mammoth Lake, California   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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