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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향 May 12. 2023

[3] 군수사령관,
아름다운 동행인의 또 다른 이름

- 진정 스키도 못 타는 이가 매주 꼬박꼬박 스키장에 갑니다.

스키 고수님 모시고 스키를 타는 것만큼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 운동도 없을듯하다. 고수님이 앞에서 휘리릭 슬로프를 따라 유연한 몸짓으로 내려가시면 훈련병은 그 스키자국 곡선을 따라 활강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고수님의 유연한 몸짓을 흉내 내는 것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몸짓 발짓도 못하는 신참 훈련병일진대, 넘어지지 않으면 그날의 성적은 우수하다 할 수 있겠다.


넘어지지 않고 엄지발가락과 정강이 안쪽뼈에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온몸의 체중을 싣고 간신히 내려와 고수님이 서계신 곳까지 다다르면, 고수님은 훈련병을 기다리느라 온몸이 꽁꽁 얼어있었던 차에, 휑하니 뒤돌아 다음번 활강을 시작하신다. 내려오느라 고생했다는 수고나 그런대로 잘했다는 칭찬은 바라지도 않는다. 아무리 그래도, 생면부지 남도 아니고 십수 년 함께 동행해 온 파트너인데, 눈이라도 맞추고 다음번 슬로프 끝에 가서 몸을 녹이자는 둥, 어찌어찌 대사 한마디는 있어야 정상 아닌가.


내가 내 키보다 더 큰  스키 젓가락 두 개로, 엉덩이와 고관절에 잔뜩 힘을 주어 어렵게 팔자를 유지하면서  지지직~ 브레이크를 시행하며 힘겨운 착지 동작을 하고 있다. 그런데, 내 몸에 달린 스키 젓가락 두 개의 시동이 채 꺼지기도 전에 쏜살같이 뒤를 돌아서 가는 고수님의 뒷모습에 대고 나도 모르게 육두문자를 내뱉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몇 년을 따라다니다 보니, 나는 나대로 스트레스 만발, 고수님은 고수대로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나름 해결책으로 아침에 한두 번은 함께 초급자 코스에서 탄 후, 나머지 시간은 따로 각자 급수에 맞는 슬로프를 이용하다 보니, 하루종일 만날 일이 없는 스키트립이 되곤 했다. 


한 번은 와장창 넘어지면서 사타구니를 다쳤었는데, 제대로 걸음도 걷기 어려운 상황이 되니 고민에 빠졌다. 내가 스키에 진심도 아니고, 자박자박 걷는 것은 하겠지만, 하루 종일 에너지 고갈되도록 스키를 타고 저녁에 식사를 만들고 돌아오는 귀갓길 운전을 하고한 힘든 일정은 분명 내게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시작된 군수사령관 보직. 고수님, J는 남들에게 나를 그렇게 칭한다. 혹자는, 나의 돌아가신 아버지가 고위급 군인 혹은 4성 장군이셨다고 알고 있다. 


스키를 내려놓았음에도, 나는 J와 함께 매주 스키장을 찾는다. 

그 어느 해보다 폭설에 폭설이 끝도 없는 이번 시즌. 11월 첫 주부터 출정하신 고수, J는 자그마치 마흔 번이 넘는 스키활강 Day를 기록했다. 본인도 평생의 과업을 이룬 셈이다.  한번 출정에 일주일, 몇 주일씩 스키장에서 지내면서 여유롭게 스키를 타는 사람들에 비하면, 주말에 6시간을 넘게 꼬박 달려가서 스키를 타야 하는 J로서는 대단한 기록이다. 주말에 도착해서 토, 일요일 이틀씩 탄다고 하면 최소 20번을 간 것이니, 20번이면 꽉 채운 5개월인 셈이고, 일 년 내내 햇빛이 강한 캘리포니아에서 40번 출정했다는 얘기가 사실 믿기 어려운 일이긴 하다. 

스키슬로프에서 롯지로 향하는길...설국에서 길을 잃은 판이다.

이리도 진심인데, 내 서포트가 필요한 건 당연한 일이라 생각이 든다. 군수사령관이든 동행이든, J는 그나마 편안히 스키를 맘 편히 탈 수 있어 좋고, 콧구멍에 바람 쐬기에 진심인 나는 밖으로 나갈 수 있어 좋은 것. 운전할 때 졸기 일쑤인 J가 혼자서 매머드까지 스키출정을 하면 나는 2박 3일을 꼬박 긴장할 수밖에 없다. 혹시라도 졸음운전을 할까 봐, 운전하는 중일 때는 새벽에도 알람을 맞추어놓고 일어나 전화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피곤이 밀려올까 수시로 전화를 해서 분위기를 전환해주곤 한다.

RV Park office가 눈에 파묻혔다.

타고난 유전자덕에 운전을 좋아하시는 친정아버지를 닮아, 나 또한 운전하면서 창밖 경치를 감상하고, 코 골며 잠자는 J옆에서 이어 피스를 끼고 음악 듣는 순간을 즐기곤 한다.

본격적인 빙판길에 들어서기전 체인을 껴야 한다.

서로가 목적은 다를 수 있으나, 아웃도어를 위해 차를 몰고 길을 나서는 순간, 그 벅차오르는 흥분과 가벼운 긴장은 삶의 진한 활명수이다.

더군다가 그 목적지가, 매일의 고달픈 일상이 이루어지는 강한 햇빛뿐인 사막의 땅에서 6시간 달리면 만날 수 있는 겨울 왕국이라면, 운전의 수고는 Piece of Cake이기도 하겠다.


캠퍼밴 안에서 해 먹는 요리들이다.. 군수사령관의 직책인 만큼 그에 걸맞은 품위 있는 요리를 하려고 나름 애는 쓰는 편..ㅎㅎ

온 모밀면
J의 최대 메뉴, 두부김치
쌀쌀한 밤에 떠먹는 국물맛 최고, 홍합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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