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향 Jun 06. 2023

[4] 395번, 진심으로 내가 추앙하는 길

- 길 위에 서면 날 선 생각도, 우울한 미래도 모두 해결책이 있다

맨 처음 이 길을 달렸던 때는 미국에 입성하고 몇 달도 지나지 않았던 시기였었다.  공부하는 남편의 친구 그리고 그들의 와이프들과도 교류하는 것만이 내 삶의 유일한 탈출구였던 시절. 차도 없고, 친구도 없는 미국땅에서 만나게 되는 한국 사람들과의 교류는 내게 활력을 주곤 했었다.


어느 주말, 남편의 친구들이 갔다는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합류하겠다는 섣부른 결정을 순식간에 내린 우리는 젊음의 호기를 무기 삼아 그날 저녁 야밤에 공원에 도착했고 친구부부와 반갑게 만났다.

동네에서 놀던 버릇이 어디 가겠는가, 두 살배기 아가를 제대로 잠재우지도 못할 만큼 우리는 밤새 술을 마셨다. 그리고 눈도 안 떠지는 새벽, 술김에 조우했던 Glacier Point에서의 해맞이는 감격 그 자체였다.

Glacier Point에서 바라다 뵈는 Half Dome

그렇게 어설픈 국립공원 첫 출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끝도 없이 펼쳐진 도로를 따라 집으로 향했다. 말로만 듣던 사막, 내가 아는 사막은 모래 바람이 불고 생명이라곤 풀 한 포기 하나 없는 그런 곳이었는데, 이곳은 말이 사막이지 광야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날리는 세찬 모래,  바람에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드럼통만 한 가시 덩굴들, 가스를 주입하기 위해 차문을 열기도 힘들 만큼 엄청난 바람이 부는 Mojavie(모하비).

황야의 무법자가 방금이라도 살롱문을 발로 차고 들이닥칠 것 같은 황량한 느낌의 가게들, 한국의 벽촌에서나 만날 법한 담배가게 같은 작은 상점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술에 곯아 정신은 혼미했지만, 한국에서 볼 수 없었던 창밖 풍경을 넋 놓고 바라보았던 삼십여 년 전의 기억이다.


그리고 지금,

열손가락으로 다 열거하기도 쉽지 않은 작은 소도시들, 호젓한 캠프 그라운드들, 숨겨진 비밀의 비박지들, 한여름 비지땀을 흘리면서도 자주 찾게 되는 하이킹 코스들, 여름이면 자전거로 겨울이면 스키어들로 붐비는 맘모스.


속속들이  아름다운 풍경과 추억들을 무한히 품고 있는 곳인 395번 하이웨이이다.

Yosemite National Park/Cathedral Peak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일 년에 30-40번 정도는 이 길을 달린다. 캘리포니아를 지나 네바다 주를 지나고 캐나다 국경까지 연결되는, 395번 하이웨이는  총길이가 1,306 마일에(2,100 Km) 달하지만, 나는 주로 레이크타호 정도까지를 오가곤 한다.


가장 자주 가는 맘모스 스키장까지만 해도 320마일(514 km)이고 쉬지 않고 달리면 5시간 반 정도 걸리는 곳이라, 처음 이 길을 가는 사람은 상당한 거리에 놀라곤 한다. 하지만, 지난 십수 년 동안 동행과 함께 이 길을 하루가 멀다 하고 달려온 나는, 이제는 거리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몇 개 주제를 얘기하거나, 재미있는 유튜브  몇 개 영상만 봐도 시간이 훌쩍 지나곤 한다.

맘모스 레잌 북쪽에 위치한  Mono Lake

무엇보다, 사계절, 매주가 다르게 자연이 보여주는 창밖의 풍경은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메마른 사막이나 광야가 무슨 멋이 있겠느냐 생각하면 오산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달라지는 길가의 풍경 그리고 그 뒷배경이 되어주는 시에라 네바다 산맥이 있다.

캘리포니아의 등뼈인 시에라 네바다 산맥의 서쪽으로는 캘리포니아의 최대 농산물 생산지이자 주도인 Fresno와 농장지대가 빽빽이 들어찬 Bakersfield가 있고 산 깊은 곳에 위치한 국립공원, Yosemite, King Canyon,  Sequoiya National  Park들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산맥의 동편은 Eastern Sierra라고 명명된 산맥이 Mojavie 근처까지 뻗어져 내려오고 있고 미국 본토에서 가장 높은 산인 Mt. Whitney 가 위치해 있다. 그리고 그 주변에 위치한 14,000 FT가 넘는 어마어마한 고봉들이 줄지어 서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감흥을 주는 그 고봉들을 병풍 삼아 계절에 따라 변하는 395번 도로를 달리다 보면, 집안의 사소한 걱정거리나 회사에서의 스트레스는 어느새 날아가고, 가슴이 뚫리고 장엄한 자연 앞에서 종종거리는 내 마음을 다독거리게 되는 경험을 하곤 한다.


매번 바리바리 먹거리를 싸가지고 다니는 우리가 소도시에 내려서 음식을 사 먹을 일은 자주 없다. 하지만, 어쩌다 가끔 잠시 쉬기 위해 차를 세우고, 커피 한잔을 사던가, 차에 주유를 하던가, 시장기를 신속히 달래기 위해 피자집을 들리는 때가 있다. 그럴 때면 하나같이 순수하고 어릴 적 TV에서 보았던 '초원의 집' 주인공들을 닮은 이들을 종종 만나곤 한다.

이제는 잠잠해진 코로나가 전 세계를 뒤흔드는 시간들 속에서도,  고공 인플레이션으로 물가가 비싸다는 아우성들 속에서도, 어쩐지 그들의 발걸음은 여전히 느릿하고 두려운 법이 없어 보인다.

Bishop, CA 에서 맘모스 스키장으로 가는 깔딱고갯길

이곳에 사는 이들은, 무엇을 해서 먹고 살고,  어찌 시간을 보내며 살고 있는 사람들인지 늘 궁금하다. 하루 24시간을 쪼개고 쪼개어도 모자라는 삶을 사는 내게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 느린 발걸음의 주민들이 주는 교훈은 하나.  그 어떤 삶도 만만치 않을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렇기는 하나, 종종거린다고 또는 안달 복달을 한다고, 그 만만치 않은 삶이 여유로워 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

이 글을 쓰고 있는 사이, J에게서 연락이 왔다. 주말에 떠나야 하니 급히 짐을 싸라는 지령과 함께.


몇 주 휴강이었던 395번 도로의 철학 강의 시간이 다시 시작되는군.ㅎㅎ

이전 04화 [3] 군수사령관, 아름다운 동행인의 또 다른 이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