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너무 좋은데 표현할 방법이 없네

감정을 쓰는 법

by 김주미


“넌 너무 감정적이야!”


제가 20대 때 일터에서 많이 들었던 말입니다. 직업인으로 산 지 26년 차이니 이젠 타인과 협업하는 과정에서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편이고 성과물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도 결과에 감정을 싣지 않고 담담히 받아들이고 평가하려 합니다.


제게 프로페셔널한 직업인은 감정을 억제하거나 외면하는 데에 능숙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쌓였나 봅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제 안에서 작은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상황에 따라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내면의 감정을 꼭 나쁜 것으로 보아야 할까라는 생각이죠. 과연, 감정이란 무엇인지부터 차근차근 짚어봐야겠습니다.


국어사전에서 ‘감정’의 뜻을 찾아보면 ‘어떤 현상이나 일에 대하여 일어나는 마음이나 느끼는 기분’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럼 ‘기분’은 또 뭘까요? ‘기분’은 ‘대상, 환경 따위에 따라 마음에 절로 생기며 한동안 지속되는, 유쾌함이나 불쾌함 따위의 감정’ 또는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나 분위기’라고 합니다. 두 어휘의 뜻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어떤 일이나 대상, 주위에 영향을 받아 일어난 내 마음의 상태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종종 “아무 일도 없는데 갑자기 기분이 안 좋아!"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신도 눈치채지 못한 외부 자극 때문에 그 사람의 감정이 변한 게 아닐까요?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 순간의 감정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넘기고 싶을 때도 있지만, 사실 감정은 유쾌함이나 불쾌함 같은 주관적 느낌뿐 아니라 신체 반응과 인지 상태까지 좌우하는 복합적인 경험이랍니다. 그러니 기분과 감정을 제대로 읽는 데에도, 읽은 후 해석하는 과정에도 시간과 공이 드는 게 당연합니다.


얼마 전 유튜브에서 한 아동심리 전문가가 요즘 아이들이 ‘짜증’이라는 단어를 너무 많이 사용해 문제라고 말하더군요. '짜증 난다'라는 표현이 만능인 것처럼 자신의 감정과 기분을 자세히 살피지 않고 무조건 뭉뚱그려 표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디 아이들만 그럴까요? 일단 저의 경험부터 고백해야겠네요.


며칠 전의 일입니다. ‘머피의 법칙’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겠다는 듯 아침부터 제 앞에 놓인 일들이 미세하게 엉크러 지기 시작하더니 오후엔 난생처음 경찰서에 가서 진술서를 써야 하는 일까지 벌어졌어요. 그야말로 운 나쁜 날이었죠! 어디서부터 잘못되고 꼬였길래 불행들이 꼬리를 무는지 모르겠다며 지쳐있을 때 하필이면, 엄마와 마주했습니다. 하루 종일 속으로 꾹꾹 욱여넣었던 나쁜 기운들이 흘러넘치듯 바깥으로 새고 있던 참이었 거든요. 엄마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 깜박하고 중요한 물건을 집에 두고 왔다는 엄마를 향해 저도 모르게 소리를 쳤습니다.


“아이, 짜증 나! 짜증 나게 여기까지 왔는데, 이게 뭐야. 진짜 짜증 나, 엄마!”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새도 없이 엄마의 놀란 표정을 보자 ‘아차’ 싶었어요. 못된 말을 던져버린 저조차 어쩔 줄 몰라하고 있을 때, 엄마는 덥석 제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미야, 무슨 일이야? 오늘 무슨 일 있지? 엄마한텐 괜찮아. 뭐가 그리 속상해? 화나거나 억울한 일 있으면 참지 말고 말해봐.”


엄마는 어쩜 그럴까요? 짜증 난다고 말했는데, 평소와는 다른 하루가 이어졌음을 눈치채고 ‘짜증’이란 단어의 진짜 뜻이 ‘속상함’과 ‘억울함’의 덩어리임을 단박에 알아채는 사람입니다. 차라리 엄마가 "갑자기 나한테 왜 짜증이야?"라고 되받았다면 이렇게 부끄럽지는 않았을까요?

‘이 나이에도 나는 엄마 앞에서 감정 표현이 서툰 아이이구나’라는 한심함에 머리 위로 쏟구치던 화의 기운이 압력솥 증기가 빠지듯 몸 밖으로 ‘푸욱’하고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마터면 털썩 주저앉아 ‘으앙!’하고 울음을 쏟아낼 뻔했다니까요.


엄마가 제 감정을 정확히 읽어주고 해석해 주자 하루 종일 엉켜 가슴 한가운데 막혀있던 실타래가 매끈하게 풀리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내내 불쾌하던 감정이, 마음 안에서 일던 부정적 기분이 무엇 때문인지 또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차근차근 되짚어볼 수 있었어요.


어디 불쾌한 감정만 그런가요! 유쾌한 기분 또한 왜 그 사물을, 그 사람을, 그 상황을 마주하면 괜스레 웃음이 나고 근심이 사라지는지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답니다. 좋아하면 얼마만큼 좋아하는지, 사랑하면 마음의 깊이가 어디까지인지 가늠해 보는 거죠. 실제 심리 전문가들은 감정 인식이 삶의 질을 높이고 정신 건강을 돌보는 데에 필수라고 말합니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좋으면 얼마만큼 좋아?”라는 물음은 영유아들에게만 건넬 질문이 아니었던 거죠. 오히려 어른이 된 자신에게 꼭 물어보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 답을 언어로, 그림으로, 음악으로 표현해봐야 할 ‘자기 이해’의 필수 과정인 셈입니다.


저에게 요즘 좋은 기분을 선사하는 대상은 '그림책'이에요. 처음엔 '어른을 위한 그림책'에서 위로를 받다가 최근엔 유아나 어린이용 그림책을 찾아보며 때론 웃고 때론 눈물을 훔치고 있죠. 그중 최숙희 작가의 <네 기분은 어떤 색깔이니?>라는 그림책은 서재 한가운데 펼쳐놓고 주위 사람들에게 선물을 하며 아껴 읽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아이들이 자신의 감정을 색깔로 표현하도록 유도하는데요, 예를 들어 설렘은 노랑, 수줍음은 연두, 신남은 주황 같이 복잡한 감정을 다양한 색채로 표현하도록 돕습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모든 감정은 고유의 색이 있다고, 그러니 외면하지 말고 다 소중히 여기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그림책 <네 기분은 어떤 색깔이니?>



여러분의 오늘 기분은 무슨 색깔이었나요? 설마 하나의 색으로 하루를 다 설명할 생각은 아니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좋아하는 맛과 향을 지닌 커피 한잔을 마셨을 때, 제철 식재료의 음식을 대접받았을 때, 사랑하는 이와 손을 잡거나 포옹을 하며 서로의 온기를 나누었을 때 무엇 때문에 좋았고, 얼마나 좋았는지 떠올려 보세요!

그리고 한 편의 글로 옮겨보는 겁니다. 어렵게 느껴진다면 평소 제가 감정을 마주하며 언어화하는 법을 살짝 알려드릴게요.


첫째, 그때 상황은 어땠는지 앞뒤 맥락을 구체적으로 서술합니다.


둘째, 해당 기분을 느꼈을 때 신체의 반응 등을 감각에 치중해 묘사해 보도록 하죠.


셋째, 기분이나 감정에 빠져들어 글을 이어가기 힘들다면 감정을 의인화하거나 수치화해서 써보는 방법이 도움이 될 겁니다.


넷째,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에 대해 스스로 평가하거나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말고 처음에는 그저 솔직하게 써 내려가기를 권합니다. 다 쓴 후, 세상에 공개하기 어렵다 싶으면 나만의 서랍 속에 넣어두면 그만이니까요.


다섯째, 나만의 기록으로 남기기 아깝거나 누군가 공감해 주길 바란다면 훗날 퇴고 과정을 거쳐 독자에게 보다 친절한 글로 다듬으면 됩니다. 이때, 모든 사람들이 내 기분과 같을 것이라는 기대는 버리고 지구상 어딘가에는 나와 같은 감정을 인식한 사람이 있겠지라는 소박한 희망으로 글을 쓸 용기를 따뜻하게 데우시기 바랍니다.


"넌 너무 감정적이야!"


저는 이제 이 말을 지금 다시 듣게 된다면 속으론 이렇게 생각할 거예요. '오, 밤에 쓸 글감이 생겼군! 오늘 생겨난 감정들과 진지하게 대화를 좀 해봐야겠는걸?'하고 말이죠. 감정을 쓰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나 자신을 읽고 해석하는 연구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keyword
이전 04화취향의 연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