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은 어디에나 있다
첫 직업이 방송작가여서 그런지 아직도 버리지 못하는 직업병이 있어요. 여러 사람이 모였을 때 어색한 침묵이 흐르면 견디지 못합니다. 그것뿐인가요? 대화의 방향이 민감한 주제로 흘러가면 얼른 분위기를 전환할 다른 화젯거리를 찾아내야 마음이 놓입니다. 이럴 때는 주로 앞에 앉은 사람에게 음식 취향을 물어 분위기를 바꾸곤 하는데요. 다양하고 재미있는 답이 되돌아올 때가 많습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당신의 마지막 한 끼는 무엇이 되었으면 좋겠나요?"
이 질문을 던지면 단순히 선호하는 음식 종류를 말하는 이도 있지만 보다 구체적으로 요리를 해주는 사람을 언급하거나 특정 식당 이름을 넣어 답하는 이도 있답니다. 어떤 시기에 누군가와 먹었던 요리가 맛있었다며 자신의 추억 한 자락을 내어놓는 사람도 있죠. 좋아하는 음식을, 그리고 음식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의 얼굴은 어느새 잔잔한 미소가 번지고 공간을 채우던 긴장감도 서서히 풀립니다.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마주한 사람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그가 좋아한 음식을 주인공 삼아 이런저런 서사를 만들어 가는데요. 주인공(음식)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언제 처음 만났는지, 만나지 못해 힘들었던 적은 없는지, 자신의 일상에서 어떤 존재인지 등을 물어봅니다. 여기에 돌아온 답들을 하나씩 꿰어가다 보면 그이만의 고유한 이야기 한 편이 뚝딱 완성되는 거죠. 바로, 음식이라는 글감을 통해서요.
오늘도 역시 제 사례로 설명을 덧붙여 볼게요. 내일 이 생이 끝난다면 저는 마지막 한 끼로 꼭 떡볶이를 먹고 싶어요. 가능하다면 엄마가 만들어준 떡볶이면 더욱 좋겠습니다. 떡볶이를 얼마나 좋아하는 거냐고요? 해외에 나가면 현지 음식을 주로 먹으려 하지만 그래도 긴 여행 중 제일 생각나는 맛은 떡볶이입니다. 떡볶이 이 녀석은 스트레스가 많이 쌓인 날 저도 모르게 이끌리는 매콤함이고 그리운 유년 시절의 향이 배어있는 음식이죠.
떡볶이 사랑에 관한 연대기를 쓴다면 이야기는 아마 이렇게 시작할 거예요. 80년대, 저는 시장 골목의 작은 분식집 딸이었습니다. 제 소원은 온전한 모양의 떡볶이를 물릴 때까지 먹어보는 거였죠. 엄마는 음식 솜씨가 좋아 동네에서 꽤 소문난 분식집을 운영했는데요. 손님들에게 인기 있는 메뉴인 떡볶이를 제 때 팔지 못하면 어쩌나 해서 딸이 먹고 싶다고 해도 "나중에", "나중에"로 달래며 말렸죠. 그러다 부러진 떡이 나오거나 그날따라 팔리지 않고 남은 양이 있으면 그제야 떡볶이는 제 몫이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저의 떡볶이 사랑은 이어졌어요. 90년대, 20대가 되어 낯선 서울을 방문했을 때 처음 먹어본 신당동 떡볶이의 비주얼과 맛은 그야말로 저를 신세계로 안내했고요, 2000년대에 밤낮이 바뀌는 방송작가 생활을 하면서 위경련을 앓게 되어 떡볶이를 먹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을 땐 우울한 일상을 버텨내야 했죠. 중년이 될 때까지 다채로운 음식들을 맛볼 수 있는 여건을 갖추게 되었고 훌륭한 요리들을 경험할 기회도 많았지만, 2025년 현재도 저의 '최애'는 떡볶이입니다. 물론 건강에 대한 관심이 많아져 먹는 횟수는 줄고 있지만 '지속가능한' 떡볶이 사랑을 위해 오히려 운동을 늘이고 몸에 좋은 식습관을 들이려 애쓰고 있답니다.
고작 ‘떡볶이’ 뿐인데도 이렇게 쓸 거리가, 나눌 이야기가 많다는 게 믿어지시나요? 떡볶이에 대한 제 취향을 고백했을 뿐인데, 저라는 사람의 인생사가 조금은 그려지지 않나요? 자, 그럼 이제부터는 여러분의 취향 연대기를 펼쳐주세요.
정작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요즘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답하는 것부터 막힌다면 자신의 핸드폰 사진첩을 펼쳐보거나 SNS를 관찰해 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거기에서 분명 ‘나의 취향’을 대변하는 한 장의 사진이나 그와 관련한 글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자신이 애호하는 대상을 발견했다면 이제 그 대상을 의인화하여 나름의 성장 서사를 구축해 봅시다. 아래의 질문에 답한다고 생각하면서 글을 이어나가 봅니다.
기) 나는 왜 OO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만남)
승) 내가 OO을 좋아하는 마음은 어떻게 변했을까? (변화)
전) OO이 나의 취향이 되는 데에 어려움은 없었을까? (위기)
결) OO은 결국 내 일상(삶)에서 어떤 의미로 남을까?(미래)
이런 과정을 거치다 보면 한 장의 사진을 찍고, 한 편의 감상문을 쓰는 데에도 자신만의 고유한 관점이나 경험이 반영된다는 사실을 체득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애정하고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 글을 쓰는 시간은 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취향이라는 돋보기를 통해 마주하고 깊이 들여다보는 방법이기도 하거든요.
취향의 연대기를 쓰고, 취향을 의인화하여 인생 그래프를 그려보는 일! 자기 자신을 탐색하는 여행의 친절한 길잡이가 되어 줄 겁니다.
“달리기에 대해 정직하게 쓴다는 것은, 나라는 인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정직하게 쓰는 일이기도 했다. 글을 쓰는 도중에 나는 그런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책은 달리기라는 행위를 축으로 한 일종의 ‘회고록’으로 읽어주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서문 中에서.
(*이미지 생성: ChatGPT (OpenA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