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유산을 겪고 나니 사실 완벽하게 안정기가 되기까지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심지어는 처음 임신테스터기를 보고 남편에게도 한 8주까지는 숨길까 생각했다. 우리가 함께 상처받았던 시간들이 자꾸 떠올라서, 이번에는 유산되더라도 나 혼자만 슬픔을 감당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이 아이는 나만의 아이가 아니라 남편의 아이이기도 하다는 생각으로, 남편에게는 임신을 알게 된 후 바로 알려주었다. 역시 그의 얼굴에는 두번 째 임테기 두 줄을 확인했던 나와같이, 기쁨보다 또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의 표정이 먼저 지나갔다. 우리는 임신 8주가 될때까지 이 소중한 비밀을 우리만 간직했다.
그 다음은 부모님의 차례였다. 부모님께도 알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나만큼 상처받는 엄마의 얼굴을 한번 본터라 부모님께는 8주차에 병원에서 심장소리를 들은 뒤에 말씀드렸다. 사실 부모님께는 12주 쯤 완전히 안정기에 들어가고 난 후에 말씀드려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엄마도 처음에는 실망은 했지만, 나처럼 '원인 찾기'를 많이하기 때문에 사실 잔소리도 그만큼 많이 따라왔다. 운전을 하면, 왜 몸이 긴장되게 운전을 하냐, 일을 무리하게 하면, 일을 너무 많이 하지 말라고 잔소리, 라면을 먹으면, 라면같은 것은 태아에게 좋지않다고 잔소리를 하셨다. 너무 일거수일투족이 잔소리가 될 수 있으니 부모님의 성향을 봐가며 8주~12주 사이에 말씀드리면 적당할 것 같다.
친구들에게는 나의 태몽을 꿔준 절친한 친구들에게는 먼저 알리고, 가깝지 않은 친구들은 기회가 되거나 연락이 오면 알리게 되었다. 굳이 16주 전까지 알릴 생각이 없었기때문에, 회 같은 날 음식을 먹자고 제안받을 때나 너무 과격한 액티비티 등을 하자고 하면 거절할 명분을 찾기 힘들어 그냥 임신을 했다고 솔직하게 말을 했다.
다음 타자는 회사. 회사는 각 나라나 개별 회사의 정책에 따라 다르겠지만, 사실 회사는 내가 가장 늦게 말하고 싶었던 곳이었다. 한국에서는 임신 중 일찍 퇴근할 수 있는 제도가 있어서 임신 초기부터 회사에 알리는 경우가 있지만, 미국은 그런 제도가 없기때문에 일찍 말할수록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임신을 했기때문에 일을 줄여주는 것은 전적으로 매니저의 재량이고, 사실 해고가 너무 쉬운 나라기때문에 아무리 임신으로 인한 차별 금지법이 있다하더라도 어떤 이유든 대면서 해고 당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최대한 늦게 알릴 수 있을 때 알리려고 다짐했다. 매일 매일 잠을 줄여야하는 일이 나에게 몰려들기 전까지.
결국 회사에는 매니저에게만 18주쯤에 알리게 되었다. 안정기에 접어들었지만, 일의 강도가 좀 심했기때문에 양해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예상대로, 매니저는 말로는 "임신을 축하하고, 일을 너무 무리하게 하지말라"면서도, 사실상 업무 강도에 변화는 없었다. 오히려 말을 하고나서 괜히 임신을 핑계로 일을 설렁설렁 한다는 느낌을 줄까봐 오히려 더 긴장하면서 일하게 되었다.
우리 회사는 유급 출산 휴가를 최대 8주를 제공하고, 나머지는 무급인 대신 뉴욕주에서 약 50% 정도로 10주 정도 패밀리 리브를 추가로 사용할 수 있다. 어떤 회사는 유급 출산 휴가를 전혀 제공하지 않는 곳도 있기때문에, 8주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남편의 회사가 유급 6개월을 갈 수 있는 것을 고려하면 조금 짜긴하다. 나는 임신 소식을 알리면서, 유급 출산휴가와 뉴욕주의 패밀리 리브를 합쳐 18주의 출산휴가를 가겠다고 매니저에게 보고했다. 자식을 키워본 경험이 없는 나의 매니저는 거기에 정말 잊을 수 없는 명언을 남겼다.
"임신 한 것 정말 축하해요. 우리 회사는 임신과 출산, 그리고 페밀리 케어를 적극적으로 장려해요. 18주나 휴가를 가는만큼 휴가 남는 시간에는 새로운 업계 관련 공부를 하면서, 돌아와서 바로 업무에 적용할 수 있도록 노력해도 좋을 것 같아요"
화도 나지 않을만큼 어이가 없었고, 역시 회사와 회사동료들에게는 최대한 늦게 알릴수록 좋다는 교훈을 얻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