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하게 배려받아도 괜찮아
최근 한국에서 임산부 좌석이 꽤 뜨거운 감자가 되어있는 것 같다. 아마 내가 임신을 해서인지 임산부에 관한 내용이 더 눈에 띄는 것일 수도 있다. 커뮤니티에서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임산부 좌석에 앉아서 휴대폰을 하고 임산부 배지를 한 임산부가 가까이 가도 비켜주기는 커녕 심지어 자는 척 한다는 소식까지 볼 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좌석이 임산부석이 아니라 임산부 배려석이기 때문에 배려는 자율의 영역이라서 굳이 비켜주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도 펼쳤다. 과연 놀라운 발상이었다. 사실 나도 돌이켜보면 너무 피곤하고 서있을 힘이 없을 때면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서 임산부가 오면 비켜줘야지하는 안일한 생각을 했던 적도 있었다. 임산부가 되고보니 사실 그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 자리인지 더욱 와닿게 되었다.
사실 이런 약자 배려석에 대한 것은 한국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내가 사는 뉴욕에서도 이런 일은 빈번하다. 임신 초기, 배가 나오지 않아서 누구도 임산부인 것을 알기 어려웠을 때 나는 무거운 가방을 들고 약자 배려석 앞에 서있었다. 초기는 불안정한 시기라 사실 가장 조심해야 하지만 나는 자리를 비켜달라고 말 할 용기가 정말 없었다. 아랫배가 밑으로 꺼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버스가 멈출 때마다 배에 힘을 주고 버스의 관성 작용을 버티느라 체력도 많이 소모됐다. 그리거 다음 날 나는 유산을 했다.
두번째 임신 초기에는 차를 바로 사고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배려를 바라거나 요구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임신 중기가 되어서 누구봐도 임신일 때 버스를 한 번 탈 기회가 있었다. 그 날 역시 퇴근 시간이라 버스는 만석이었다. 다행이 임신 중기고 안정기여서, 운동도 꾸준히 하고 있었기때문에 괜찮다는 확신이 있어서 버스를 탄 것 이었다. 약자 배려석에 앉아 있는 모두가 폰에 열중하느라 임산부인 내가 지나가는 걸 보지 못했다. 뒤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밀리다보니 중간까지 들어왔을 때 앉아 있던 한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그 아저씨는 나와 내 배를 번갈아보더니 옆을 한 번 바라보고는 이내 폰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럼 그렇지.
미국도 한국과 다르지 않다. 나는 태연하게 폰을 꺼내고 인스타그램에서 릴스를 봤다. 그 때 나를 바라보던 아저씨의 옆자리 30대 인도 여성이 폰을 보다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 분은 바로 나를 툭툭 치더니 자기 자리에 앉으라며 망설임없이 말을 걸어주었다. 마음 속으로는 정말 감동적이고 인류애를 잠깐 느꼈지만 집까지 5분도 남지 않은 상황이라 고맙지만 괜찮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이 꼭 대중교통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임신 중기가 넘어가면 화장실을 정말 자주 가게 된다. 아기가 발로 방광을 툭 차는 느낌이 나면 금새 화장실이 가고 싶어진다. 협소해진 뱃속에서 방광이 크게 부풀 공간이 없다보니 소변을 참는 일에 꽤 어려워서 가끔 나도 모르게 웃거나 힘을 주다가 소변이 찔끔 새는 일더 빈번하다. 그래서 밖에 나갈 때는 화장실이 정말 중요하다.
하와이 태교 여행 때 한 공중 화장실에 갔다. 내 앞에는 두명의 백인 여성과(친구인 듯 보였다) 그 둘의 아이 두명이 있었다. 나는 뒤에 줄을 서서 한참을 기다렸다. 다행이 화장실을 미리 미리 가자는 주의였기때문에 못기다릴만큼 급하지는 않았지만 점점 급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이들이라서 그런지 화장실 사용이 성인보다 조금 오래 걸렸다. 그 때 내 뒤로 다른 백인 중년 여성이 오더니 나를 보고는 큰 소리로 내 앞의 사람들이 다 들리게 말을 했다. “저 사람들은 네가 먼저 갈 수 있도록 배려해줘야 하는데 임산부를 이렇게 기다리게 하다니.”
내 앞에 있던 두 백인 여자는 그 여자를 힐끗 보더니 “아이들이 급해서 어쩔 수 없었네. 얼른 들어가“ 라며 나를 들어가게 해주었다.
배가 나올수록 화장실, 대중교통, 공공시설 등에서 임산부로서 배려를 받을 때가 많아지고 있다. 심지어 친구들을 만나서 음식 메뉴를 정하거나 위치를 정할 때도 그렇다. 물론 전혀 관심이 없거나 신경쓰지 않는 사람들도 많지만 임신과 출산의 경험이 있는 분들은 확실히 배려의 손길을 더욱 자주 뻗어준다.
버스에서도, 화장실에서도, 나는 임산부인 나를 배려해달라고 내 입으로 말하지 못했다. 머릿속에는 나도 모르게 ‘내가 임신 유세를 부리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말하기를 꺼리게 만든다. 거절당하고 사람들이 쳐다보는 상황도 상상한다. 하지만 점점 몸이 무거워질 수록, 아이를 보호해야하겠다는 생각이 들 수록 왠지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람들이 먼저 배려해주면 감사하지만, 만약 힘들다면 나와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조금의 배려를 요청해봐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