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 덩굴이 고추를 감쌌을 때 생긴 일

30대 직장인의 텃밭 일기

by 아르페지오

제 텃밭에는 제가 좀 꺼리는 구역이 있습니다.

바질이 심어진 28번 팻말을 시작으로 적상추, 아삭이 상추, 청로메인, 깻잎을 지나 대파와 당근, 부추와 고추를 따라가다 보면 도착하게 되는, 바로 오이 구역입니다.

그 너머엔 가지와 토마토도 있지만, 제 마음속에서는 오이부터가 다른 세상입니다.

오이는 담쟁이덩굴처럼 자랍니다.

쭉쭉 뻗어나가는 덩굴을 다스리려면 수시로 대를 세워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덩굴은 대에서 흘러내려 땅 위를 기거나, 심지어는 옆 텃밭으로 넘어가려 하기도 하죠.

이번엔 오이 모종을 세 개나 심었습니다.

호기롭게 간격을 좁게 두었던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이 오이들이 고추와 가지로 덩굴을 뻗기 시작한 겁니다.

덩굴은 생존을 위해 타인을 타고 오릅니다.

저는 그저 무대뽀로, 계산 없이 시작했을 뿐인데 말이죠.

조금만 간격을 뒀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문득, 간격 이야기를 하다 며칠 전 엘리베이터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그 많은 공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 옆에 바짝 붙어서 서 있는 분이 있었습니다.

혹여나 살이라도 닿을까, 저는 괜스레 긴장하게 되더군요.

지하철이나 줄을 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가려고 붙다 보면, 자연스럽게 옆 사람과 부딪치거나 스치게 되죠.

누군가는 “에이, 그 정도 가지고 그래”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간격’이란 건, 생각보다 쉬운 게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전보다 조심스럽게 거리를 두려 노력하지만, 여전히 어렵고 어색한 일입니다.

에티켓일 수도 있고, 배려일 수도 있는 이 간격.

우리는 얼마나 자주, 얼마나 잘 지키고 있을까요?

텃밭에서 덩굴을 떼어내며,

나는 사람 사이의 거리를 다시 한 번 생각해봅니다.

서로를 감싸기 전에, 숨쉴 공간을 먼저 남겨두는 일.

그게 진짜 배려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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