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짝 친구
인(P)은 움직임이 굼뜬 굼벵이요 종일 잠만 자는 나무늘보다. 비료로서 그렇다는 거다. 밭에 비료를 주면 한지 위의 먹물이 번지듯 비료 성분은 주변으로 시나브로 퍼진다. 흙은 고체라서 그 안에서 이동이 없어 보이지만 흙덩이 안에는 저 나름의 흐름이 있다. 흙 알맹이 틈새로 물과 공기가 느리게 흐른다. 비료 양분도 물에 녹아 덩달아 흐른다. 흙은 망부석처럼 멈춘 듯 보이지만 나날이 달이 차고 기울 듯 미미하나마 움직임이 있긴 하다.
농부는 작물이 양분을 흡수하여 잘 자라도록 작물을 심은 밭에 비료를 뿌려준다. 비료를 주는 자리는 작물이 심긴 곳에서 한 뼘 가량 떨어진 곳이어야 한다. 비료를 뿌리에 닿게 주면 양분을 빨리 흡수하여 잘 자랄 것 같지만 오히려 비료와 닿는 뿌리는 화학비료의 독성으로 인해 상하게 된다. 흙덩이 틈바구니로 물이 스미면서 비료 양분도 이끼 번지듯 은근슬쩍 번진다. 향수를 뿌릴 때 코에 직접 뿌리지 않고 허공에 뿌리면 공기의 흐름을 통해 향을 맡을 수 있듯이, 비료도 뿌리와 한 뼘 거리를 두고 뿌려도 뿌리는 이 양분을 흡수할 수 있다.
학교 운동장에서 달리기를 하면 빠른 아이도 있고 느린 아이도 있듯이, 비료도 성분에 따라 퍼지는 속도에 차이가 있다. 비료를 밭에 주고 6개월 후에 얼마나 이동했나 살펴보니 질소는 76cm로 가장 멀리 번졌고 칼륨은 67cm, 마그네슘은 63cm로 적잖이 번졌다. 칼슘은 불과 18cm밖에 이동하지 못했는데 인산은 겨우 2cm만 이동했다. 인은 움직인 게 아니라 미라처럼 고대로 머문 꼴이다. 비료 양분을 장기의 말로 견주자면 질소는 이동이 가장 활발한 '차'이고, 칼륨과 마그네슘과 칼슘은 '포', '상', '마'라고 볼 수 있으며, 인은 '궁'이라고 볼 수 있다. 인은 활동영역이 좁고 움직임도 느리지만 식물은 인이 없으면 숨도 멈춘다. 인은 식물이 살리는 알짜 양분이다. 그러므로 인이 부족하지 않도록 챙겨줘야 하며, 인을 줄 때는 엄마가 아이에게 밥을 떠먹여 주듯이 뿌리 가까이에 대줘야 한다. 토양에 인이 부족하여 '장군'할 때, 농부는 인산비료를 공급하며 '멍군'하며 받아쳐야 한다. 인산은 장기의 멍군이다.
인은 부시맨처럼 추위에 약하다. 유난히 추위를 잘 타는 사람이 있듯이 비료 중에도 추위에 옴짝달싹 못하는 양분이 바로 인산이다. 가을에 심은 마늘은 겨울나기 후 초봄부터 잎을 내며 자라기 시작하는데, 마늘잎이 초록색이 아니라 자줏빛을 띠는 것이 있다. 날이 추워서 인을 흡수하지 못해서 나타나는 증상이다. 토양온도에 따른 인산의 흡수율을 보니 21℃에서는 100%이던 것이 16℃에서는 43%만 흡수되고, 13℃에서는 31%만 흡수된다. 인은 토양 내에서 움직임도 거의 없는데 날이 추우면 쇠고기 지방이 굳듯이 둔해져서 작물 뿌리에 흡수되지 않는다. 그래서 날이 추우면 토양에 인 양분이 부족하지 않더라도 인 부족현상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활발한 질소에 비하면 인은 속 터질 정도로 갑갑한 미련 곰탱이다.
인이 비록 굼벵이 같고 나무늘보 같더라도 식물 자람에 없어서는 안 될 약방의 감초다. 식물세포의 원형질을 구성하는 필수 원소이며, 생육초기의 새 뿌리나 잎이 나올 때와 꽃이 필 때 꼭 필요한 양분이다. 인은 가지와 잎의 생장을 충실하게 하고 단백질의 합성에 중요한 성분이기 때문에 과일의 수량을 늘리고 당도를 높이며 신맛을 줄여서 품질을 좋게 한다.
질소는 식물을 돋보이게 한다. 잎과 줄기를 쑥쑥 키워주는 양분이다. 하지만 질소만 가지고는 온전한 성숙을 기대할 순 없다. 외적인 성장엔 질소가 필요하지만 내적인 성숙엔 인이 있어야 한다.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지만 늘 옆자리를 지켜주는, 손 내밀면 손 잡아주는 단짝 같은 친구가 인이다. 인은 느리지만 느긋한 그런 진득한 친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