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람
식물이 자라는 데 있어 질소는 매우 중요한 양분이다. 수증기를 뺀 건조공기의 78%가 질소다. 이보다 더 풍부할 수 없다. 하지만 그림의 떡이다. 공기 중의 질소를 식물이 먹을 수는 없다. 지구의 물 중 98%인 바닷물을 사람이 마실 수 없는 것과 같다.
식물 중에는 특이하게도 공기 중의 질소를 먹는 이들도 있다. 바로 콩과식물이다. 콩을 비롯한 칡, 토끼풀, 자운영, 싸리나무, 아까시나무 등 이들 콩과식물은 공기 중의 질소를 붙잡아서 제 몸을 만드는 양분으로 이용할 수 있다. 타고나길 그렇게 태어났다. 금수저라고 할 수 있다.
실은 콩과식물이 질소를 직접 잡아먹는 것은 아니다. 콩의 뿌리에 달라붙어있는 뿌리혹박테리아가 공중의 질소를 붙잡아서 콩이 먹을 수 있도록 건네주는 것이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질소를 얻은 콩은 탄소를 뿌리혹박테리아에게 준다. 서로 거래를 하는 것이다. 이 거래 덕에 콩과식물은 여느 식물보다 잘 자란다. 덩달아 이 콩과식물 주변에 있던 식물들도 잘 자란다. 떡이 오가다 보면 떡고물이 떨어지듯 콩과식물 주변의 흙에는 이런 흘린 질소가 더러 있기 때문이다.
식물이 자라기 위해서는 물과 양분이 필요하다. 뿌리는 이 물과 양분을 찾아 흙 틈을 비집으며 파고든다. 흡사 광부가 광물을 얻기 위해 굴을 파는 것과 같다.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다. 하지만 식물이 자라려면 어떻게든 양분을 찾아야 한다.
먹어야 자라고, 자라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
우리 밥상에 차려진 음식은 쌀밥이 주이고 반찬은 고만고만 놓이는데, 식물의 밥상에는 질소가 쌀밥이고 나머지 양분은 반찬이다. 식물의 줄기와 잎을 키우는 데는 질소가 가장 중요하다. 꽃과 열매는 일단 몸을 키운 후에 생각할 문제다.
질소는 공기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흙에도 있고 동식물의 몸 안에도 스며있다. 공기 중의 질소는 자유로운 몸이지만 나머지 질소는 어딘가에 붙잡혀있다. 흙 알갱이와 퇴비의 부식물에 붙잡혀 있고, 물에 녹아 있으며, 동물의 몸을 만든 단백질에도 갇혀있다. 이들 질소는 틈만 나면 자유를 찾아 다시 하늘로 돌아가려 한다.
농부는 작물을 기르면서 부족한 질소를 비료를 통해 공급한다. 비료 속의 질소는 물에 녹아 식물의 뿌리에 흡수된다. 그런데 이 질소가 모두 식물에 흡수되는 것은 아니다. 질소는 기회를 엿보다가 틈만 나면 달아난다. 그러므로 농부는 이 질소가 달아나지 않고 식물에 흡수되도록 해야 한다. 꽁꽁 묶어 끌고 가든지, 살살 구슬리며 꼬드기든지 말이다.
질소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다. 나무꾼이 옷을 훔쳐가는 바람에 하늘로 올라가지 못한 그 선녀다. 선녀를 데리고 살려면 선녀의 비위를 맞춰줘야 한다. 선녀가 편히 쉴 수 있는 집을 짓고, 선녀가 좋아하는 음식을 주고, 선녀에게 예쁜 옷을 입혀줘야 한다. 단, 선녀옷을 주면 안 된다. 그러면 선녀는 그 옷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질소비료를 흙에 주었을 때 흙의 토양상태가 중성에 가까운 약산성이면 좋다. 만약에 알칼리성이면 질소는 암모니아 가스가 되어 하늘로 날아가 버린다. 마치 선녀가 옷을 입고 하늘로 날아가듯 말이다. 흙에는 유기물이 많으면 좋다. 질소비료를 붙잡는 손길이 많기 때문이다. 유기물은 붙임성 좋은 아이라서 질소를 비롯한 칼륨, 인 등 양분이 오면 잘 붙잡기에 양분이 떠나지 않고 흙에 머물 수 있다.
농부는 작물에게 비료를 주는 것으로 할 일 다 했다고 손 놓고 있으면 안 된다. 흙에 준 비료가 작물에 잘 흡수되도록 살펴야 하고 갖춰야 한다. 비료 주는 것만이 다는 아닌 것이다. 비료가 양분으로서 역할을 잘하도록 해야 한다. 비료만 던져주고 나머지는 작물이 알아서 자라기를 바라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고 어리석은 처사다.
많은 젊은이들이 면접을 보고 취직을 한다. 취직을 했다고 끝난 것은 아니다. 그 직장에 잘 다녀서 직장에 도움 되고 자신도 기반을 쌓아야 좋다. 계속 직장을 다닐 수 있는 끌림은 급여다. 충분한 급여를 보장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하지만 급여 하나만 보고 그 직장을 계속 다니는 것은 아니다. 작업환경, 복지혜택, 직장 분위기, 성장 가능성 등 여러 가지를 같이 본다.
직장인을 오래 그 직장에 머물게 해야 한다. 단순히 열정만 강요하고 남아있기 바란다면, 그건 토양산도도 알맞지 않고 유기물도 부족한 땅에 비료를 주고 식물이 알아서 잘 자라리라고 기대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욕심이다. 급여가 질소비료라면 직장의 분위기와 여건은 토양환경이다. 질소가 작물에 흡수되어 작물이 자라 꽃이 피고 열매를 맺듯이 젊은이가 직장에서 잘 적응하여 같이 성장하는 환경이 좋다.
틈만 나면 다시 공중으로 돌아가려 하는 질소처럼, 직장인은 때때로 퇴사를 가슴 한편에 품고 있다. 그걸 탓할 순 없다. 질소가 언젠가는 하늘로 올라가듯, 직장인도 언젠가는 직장을 떠난다. 하지만 도중에 새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질소가 식물에 흡수되어 식물을 키우다가 때가 되면 자연스레 분해되어 공중으로 날아가듯, 취직한 직장에서 직장과 함께 성장하다가 때가 되어 은퇴하면 좋겠다. 흙이 거름 지면 양분이 머무듯 직장이 만족스러우면 인재도 머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