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 튜튜도 좋지만 나에게는 도복이 더 잘 어울리는 듯하다
다섯 살 무렵, 나는 엄마 뱃속에서 나온 이후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게 된다. 엄마 손에 이끌려 간 발레 학원에서 다리를 찢던 중이었다. 다리가 쭉쭉 찢어지는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내 다리는 90도 이상 찢어지지 않았다. 그날로 발레학원은 끝이었다. 생각해보면 왜 굳이 발레여야 했는가, 에 대한 의문이 든다. 태권도 학원도 있고 축구 교실도 있었지만 엄마는 나를 그곳에 보낼 생각은 하지 못했다. 대신 남동생이 태권도 교실에 갔다가 삼일 만에 그만두었다. 늘 나보다 심약하고 피부가 하얗던 동생이었다. 당시에는 나보다 다리도 더 유연했다. 만약 동생이 발레학원에 가고 내가 태권도 교실에 갔다면 어땠을까, 종종 생각하게 된다.
스무 살 이후 여러 번 요가학원과 필라테스 학원에 등록했다. 운동을 하고 싶었고 가끔은 체중 감량을 위해서였다. 요가도 필라테스도 나에게 맞지 않았다. 인생에서 가장 유연했을 다섯 살 무렵에도 찢어지지 않던 다리가 성인이 된 뒤 찢어질 리 만무했다. 무엇보다 요가와 필라테스는 하나도 재미가 없었다. 차선책으로 내가 할 수 있었던 운동은 한강을 달리거나 자전거를 타는 것뿐이었다. 한강에서 조깅하는 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다만 운동하고 싶은 욕구가 가득했음에도 어찌할 줄 몰랐던 내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조금 안타까운 기분이 든다.
어느 날, 태권도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왜 갑자기 나의 운동 선택지에 태권도가 생긴 것인지는 모르겠다. 시대가 변해서인지 내가 변해서인지 둘 다 인지는 알 수 없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태권도가 나에게 잘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요가와 필라테스처럼 몸매를 가꾸기 위한 운동이 아니어도 괜찮겠다는 생각 말이다. 합기도를 배우러 다닌다고 하자 친구들과 가족들은 하나같이 놀랍다는 반응이었다. 합기도가 뭔지도 모르고 무작정 학원에 간 첫날, 쌍절곤을 휘두르고 낙법을 배웠다. (합기도는 집 근처에 태권도 학원이 없어서 선택한 차선책이었다.) 놀랍게도 재밌었다. 달리기를 잘하고 팔씨름에 져본 적이 없는 나에게는 요가보다 합기도가 더 잘 맞는 운동이었다.
돌이켜보면 꼭 운동뿐만이 아니었다. 세상이 강요한 수많은 ‘당위’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이 노력했던가. 나와 맞지도 않고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데 말이다. 슬프게도 그러한 당위가 내 안에 내재되는 데는 사회화가 한몫했다. 서른 살의 엄마가 나에게 가르칠 운동으로 발레밖에 생각하지 못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철이 들고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은 당위가 쏟아졌다. 화장을 해야 하고, 나서지 말아야 하고, 여자가 하기 좋은 직업을 가져야 하고... 등등. 나도 모르게 젖어드는 당위들에 대항하기는 쉽지 않았다. 오랜 시간을 내가 아닌 ‘나여야 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 애쓰며 살았다. 나의 욕망과 나 자신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이다.
지난달에 합기도 학원에서 승급시험을 봤다. 초등학생들과 같이 흰 띠에서 노란 띠로 승급을 했다. 중학생, 초등학생들과 같이 수련을 하는데도 하나도 창피하지 않았다. 요가는 하루가 멀다 하고 빠지던 내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학원에 출석했다.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봉을 휘두르고 호신술을 배우느라 굳은살이 배기고 다리가 굵어져도 상관없다. 검은 띠를 맨 나의 모습이 훨씬 더 기대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