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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퐁당 Oct 23. 2021

엄마라는 우주

[WITH]

엄마가 된다는 건

누군가의 우주가 된다는 것.

-

엄마와 눈을 마주쳤을 때 아이들의 눈은

우주의 별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

우주가 별을 품지 않았다면, 눈 맞춤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빛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조차 몰랐을 일.

-

그래서인지 누군가의 눈을 보면

그 인생의 밝음과 어둠이 읽히곤 한다.

-

나를 위해 우주가 되었던 나의 엄마처럼

나도 별을 빛나게 하는 우주가 될 수 있을까.

-

우주 속에서 별은 더 밝게 빛날 테지만

깜깜한 우주가 된다는 것은 참 두려운 일인데.

-

우주의 깜깜함을 감내할 만큼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내 눈 맞춤을 기다리는 별빛들이

내 전부가 된다는 게 무엇인지.

-

지금은 감히 짐작할 수 없을 일.



엄마와 함께 간 포르투갈 여행에서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탔을 때였다. 사람들이 가득 차 있는 버스 안에서 한 엄마가 유모차에 어린 아이 한 명, 혼자 걸을 수 있는 아이 한 명을 자리에 앉혀놓고 아이들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한쪽 어깨에는 아이들의 짐을, 한 쪽 어깨에는 핸드폰을 받친 채 아이들의 여권을 챙겼다. 아마도 남편과 통화를 하는 듯 보였다. 그녀와 아이들의 앞에 서 있던 엄마와 나는 그 세 사람을 빤히 볼 수 밖에 없었다. 아이들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원더우먼처럼 바쁘고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그녀는 아이들과 눈맞춤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엄마와 나의 시선을 인식했는지, 아이들은 우리를 보았고 천사 같은 맑은 눈망울로 방긋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은 우리를 웃게 했고, 웃는 우리를 보고 아이들도 웃었다. 그렇게 시작된 아이들과의 눈맞춤 놀이 덕분에 공항으로 가는 길은 마치 반짝이는 별들의 은하수 같았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우린 그녀의 남편을 알아차릴 수 있었는데 그의 눈도 반짝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라는 단어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울릴 수 있는 눈물버튼이다. 누군가를 돌보는 일을 전제로 하는 엄마라는 역할은 너무나도 쉽게 자기다움을 가려버리기 때문이다. 별이 빛나기 위해 우주가 깜깜한 어둠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부모라는 역할엔 어쩔 수 없는 희생이 전제되어 있다. 좋은 딸이 되고 싶었던 나는 엄마의 희생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곤 했다. 그리고 과연 내가 ‘엄마’라는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겼다. 


그러다 문득, 공항버스에서의 눈맞춤 놀이가 떠올랐다. 아이들의 눈을 반짝이게 했던 엄마의 눈맞춤, 그리고 그 아이들의 웃음이 우리에게까지 퍼지던 그 순간.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희생과 죄책감보다 서로 더 행복해지기 위한 관계로 이해해보기로 했다. 자식은 부모에게 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지만, 아이들이 웃으면 부모도 행복해지고 행복한 부모를 보는 아이들은 더 행복해지니까. 좋은 부모란 완벽한 부모가 아니라 아이와 함께 행복한 사람들인 것 같다. 어느 포르투갈 공항에서 반짝이는 눈망울의 아이들을 품에 안던 반짝이던 가족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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