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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마디 Sep 22. 2023

목동, 주공아파트, 5500, 투룸

엘리베이터

33년 18번 이사를 다니면서 엘리베이터 있는 집에 살아본 적은

-아빠집에서 딱 한 번. 우리가 처음 아파트에 살 때.

- 집에서   . 내가 처음 아파트에 살 때.



전세사기 (겨우 올라간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오다)


2023년 연초. 내 또래의 여자가 경매로 넘어간 전세 집에서 혼자 목숨을 끊었다는 뉴스에 멍했다. 딸의 장례식장에 온 아버지는, 딸이 전세 사기에 당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고 했다. 2년 넘게 홀로 속앓이를 하면서도 가족에게 말 못 한 심정을 생각하면 참담함이.. 참담함이 가슴팍에 무겁게 울컥울컥 차오른다. 서른이 넘은 그녀가 걱정에 하루 종일 시달리고 밤늦게 돌아왔을 때 현관문에는 물을 끊겠다는 단수 경고장이 붙어있었다.


2016년 겨울, 나도 전세 사기로 5500만 원을 날렸다. 아빠가 3000만 원을 주고, 내 돈 1000만 원, 빚낸 1500만 원. 도합 5500만 원.

이유는 내가 공공임대아파트의 임차인과 전전대를 계약했기 때문이다. 부동산에서 계약하고 공증료까지 냈건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불법계약이다. 부동산 계약서 대신 차용증을 썼고, 이사 절차도 전입신고와 확정일자를 받는  아니라 내가  집에 동거인으로 주소지를 옮기고,  임차인인 황지홍(가명) 인척하고  집에 사는 것이다. 애초에 불법계약이라  임차인이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더라도 형법이나 부동산 관련법의 보호를 전혀 받을  없고 민사소송 밖에 방법이 없다. 황지홍이 여기저기서 돈을 꾸고  갚았는지 자꾸 채무자들이 찾아와 감시하는 통에 나는 금방 들통이 났고 다섯 달도  살고 쫓겨났다. 아빠는 나에게 어떻게 거금을   있었냐, 허구한  집을 사고팔던 아빠는 그때 처음으로  집을 굴려서 먼저 5년간 살던 아파트를 전세 주고 나와  동네에 주택을 샀다.  나가려는 세입자와  실랑이 끝에  아파트를 청산해서 생애  2 주택 매매 시세차익으로 얻은 큰 돈을 나에게 쾌척한 것이다. 살면서 아빠에게 숫자 0 4개 이상은 받아본 적이 없는데.


그 아파트로 이사 갔을 때가 떠오른다. 용인시에 있는 빌라 5층에서 6년을 살다가 안성의 눈 덮인 하얀 논밭 뒤 아파트를 봤을 때 나는 ‘혼자라도 서울로 가야겠다’ 마음먹었고, 올케언니는 ‘어머님 다리 아프신데 드디어 엘리베이터 있는 아파트로 오셨네요~’ 축하를 건넸다. 우리 가족에게 엘리베이터는 처음이었다. 고작 2층이라 핸드카트를 끌 때만 엘리베이터를 탔고 관리비를 감당하느라 엄마는 단지 내 새벽 우유배달을 해야 했지만 어찌 됐건 번듯한 아파트에 사는 것은 아빠의 자랑이었다.

늘 “내가 집이 아니면 무슨 수로 돈을 벌겠니”하던 아빠는 자부심을 약간 부릴 수 있었겠지. 아빠도 나에게 양가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권위를 개똥으로 아는 자식새끼지만 한편으론 막둥이 딸이기도 했기에 혼자 서울에서 버티는 빡빡한 살림에 밑천을 대 주고 싶었을 것이다. 아빠로서 최소한의 도리를 했다고 가족 모두가 속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엄마가 검정고시 시험을 바로 코앞에 두고 매일 기출문제를 풀 때, 딱 그때, 관리사무소에서 최후통첩이 왔다. 빨리 집을 정리하지 않으면 고발하겠다는. 목요일인가, 엄마가 부랴부랴 서울로 올라와 용달을 부르고 나는 퇴근하고 와서 짐을 빼 1톤 트럭에 싣고 야반도주를 했다. 또다시 아빠의 집으로.



나는 왜 불법전대까지 하면서 서울에 붙어있으려고 했나?

처음에는 첫 회사가 영등포였으니까 서울에 발을 들였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인 서울’의 꿈은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되었다.


(1) 대입 : 경계선을 넘는다.

인문계 학생이라면 최소한 고등학교 때, 요즘은 초등학교 때 이미 과학고나 예중 예고, 의대 선행반이 있으니까 아주 어릴 때부터 심어질 것이다. 서울의 꿈.

인문계 문과에서 수리를 빼야 평균 2.x등급이 되는 일명 수포자였던 나는, 모의고사가 끝나면 친구들과 성적표를 들고 교무실로 달려갔다. 서울/수도권/지방 대학교 이름이 촘촘하게 줄 세워져 있는 전지 사이즈 표 앞에서 학교의 평균 등급을 매번 체크하며, 마음속으로 한 칸이라도 높은 학교를 오르고 또 올랐다. SKY가 꼭짓점에 있고 그 아래 서성한중… 나같이 모든 과목을 갖추지 못한 애매한 성적의 고3에게는 애초에 닿을 수 없는 곳이고 그저 ‘인 서울’만이, 공부해보고 싶은 분야, 그 전공의 대학교 리스트가 아니라 정원 미달의 학과라도 노려서 서울에 가는 것만이 목표였다. 그렇게 서울은 그 자체로 등급이 되었다. ‘서울’이라는 최상위 등급. ‘3’ 등급 안쪽이면 간당간당하게 경계선에 비벼볼 엄두를 낼 수 있는 곳. 그때 내 목표는 경계선을 넘는 것이 되었다.


결국 대입에 실패하고  번도 생각해   없던 보건대에 다니다가 편입으로 눈을 돌렸다. 그렇게 가고싶던 미대로. 고작 두 세명 뽑는 편입을  하겠어. 나이도 재수도 애매할  편입은  서울 대학에 비집고 들어갈 마지막 바늘구멍이다. 이렇게 나이 많은 고등학생들은 경쟁률이 더욱 빡빡한 편입이나 공무원시장으로 내몰렸다. 그리고  시장의 학원장사도 서울에 몰려있는 것을 아는가? 노량진 공무원학원, 대치동과 목동의 입시학원, 강남과 종로의 영어학원, 혹은 홍대  미술학원 골목처럼 가고 싶은 학교 앞에 입시학원가가 있다. 그래서 서울로 가기 위한 준비를 하기 위해  어쩔  없이 서울로 간다.


(2) 정규직 : 나를 여기에 고정시킨다.

나처럼 1-2년씩 준비하던 시험에 연달아 떨어지고 나면 자존감, 자신감, 통잔 잔고 모두 박살이 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빈털터리에게 기회의 땅이 되어주는 것 역시 서울. 어딜 가도 일자리가 많다. 잠시 돈을 벌어 그동안 당겨 쓴 빚을 메우며 생각 정리할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더 할 건지, 말건지. 20대 중반이 되면 대학생보다는 직장인이 더 가까운 나이다. 공부하며 돈을 번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둘 다 찍어먹어 봤기에 ‘못 먹어도 고!’를 외칠 수 없다.


1년에 한두 번 있는 시험을 준비하다 보면 나의 인생은 눈앞의 반기나 1년뿐이다. 붙을지 안 붙을지 모르니 그 이후의 계획은 할 수가 없다. 나는 편입 실패 후 우연히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중소기업에서 팀장님의 추천으로 운 좋게 인턴을 거쳐 정규직이 되었다. 하루의 대부분을 노동시간을 담보로 잡고 주는 고정 급여. 그 월급이 주는 9to6의 고정된 생활패턴과 지출규모는 나를 좀 더 멀리 데려가주었다. ‘오늘 참고, 이번 주 참고, 이번 달 참으면 월급이 나오지’ 매월 10일 월급날을 떠올리면 이런 식으로 한 달, 두 달, 1년 2년도 흘러가리라. 3-4년 지나면 승진하겠지, 서른 살 언저리에는 결혼하겠지 등. 어느덧 5-6년 후를 그리며 오늘을 흘려보냈다.

첫 정규직 월급을 받았던 2014년 12월

(3) 집 : 나의 결핍- 어엿함 (차용증)

아르바이트 120 원으로 시작한 월급이 3 차에는 220 원으로 올라있었다. 편입학원 다닐   좋게 건너 건너 아는 분의 신축 투룸에서 월세 30 원만 내고 3년쯤 살았는데 마침 집을 비워 달라고도 했고, 연봉 계산이 되니까 중기청 전세대출 우대금리와 사내 대출도 있겠다, 자신 있게 투룸 전세를 알아본 것이다.


 우리  가족은 그때 단체로 잘못된 선택을 했을까? 사기를 당하려니 어딘가에 홀린  같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 셋이 정말 그랬다. 서로를 신뢰하지 않으면서도 같이 살려고 했던 우리 .


애매한 3등급의 삶은 늘 아슬아슬했다. 경계선을 확 올라가서 안착하고 싶었다. 인정받고, 사회의 일원이 되고, 남들처럼 대출받아 번듯한 집 등기에 내 이름을 올리는 것이 나의 삶을 만들어간다는 자긍심으로 보였다. 20대 후반에는 대리로 진급하고, 결혼도 하게 되지 않을까. 이 집이라면 처음을 준비하는 신혼집으로는 나쁘지 않겠지. 회사 사람들의 결혼식과 돌잔치에 쫓아다니며 배운 그 모습으로 나도. 인생의 다음 단계를 위한 디딤돌 같은 시기에 고작 5000만 원으로 서울에서 번듯한 집을 구해 최소 5년은 살 수 있겠다는 그레이 핑크 빛 희망을 슬며시 그렸다. 그리고 엄마를 케케묵은 무기력과 우울에서 구출시켜 내가 보살필 수 있을 거라는, 자식 된 도리 아니 그 도리를 청산하는 성장한 자녀의 기분에 살짝 취하기도 했다.




그 집에 사는 다섯 달 동안 황지홍 채무자의 빚 독촉에 대신 시달리고 강제 퇴거 불안에 떨었다. 채무자가 내 집이 보이는 곳에서 언제 덮칠까 대기하고 있을 것 같아서 15층 전망을 누릴 새도 없이 저녁에 불 켜고 들어오자마자 거실 커튼을 쳤다. 원 임대인이 끝까지 연락이 안 되던 날 밤. 아. 나 이거 사기당한 거구나, 5000만 원 날리게 생겼구나 깨닫자 관자놀이가 핑핑 돌았다. 평생 (이렇게) 열심히 살아왔는데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자정이 넘어 정신을 차리고서 텅 빈 방에서 공책을 펼쳤다. 펼친 한 바닥에 가로 줄 하나를 길게 쭉 그었다. 그 줄 위에, 살면서 내가 결정했던 사건들을 점으로 찍었다. 여섯 개 왕점의 기로에서 어떤 선택지들이 있었고 나는 무엇을 선택했었는지 써 내려갔다. 매번 최선과 차선, 최악이 있었다. 나는 최악을 피해 자꾸 차선을 택했다. 최소한 망하지는 않을 선택을. ㅌ자에서 중간. 그다음 ㅌ에서 중간. 그러다 보니 자꾸 아래로 아래로. 처음의 꿈과는 점점 멀어지는 점들. 나는 어느새 지하 5층까지 내려가 있었다.


내 인생을 한 줄로 엮고 알았다. 아 내가 잘살고 싶은 욕망의 동기는 불안이었구나. 내 청소년기 성적표 같았던 입시가 실패한 이후 시작된 ‘잘못될까 봐’하는 불안의 마음. 그래서 최소한 입시처럼 망하진 않을 선택을 하며 살았던 것이다. 내가 어디로 흘러왔든지 간에 어떻게든 그 자리에 붙어 있어보려고 한 게 여기까지, 불법전대까지 선택하게 됐구나.


(집 그림)

고요한 방에서 혼자. 불안하니까 5개월 동안 아무 가구도 들여놓지 않아 텅 비어 더욱 고요한 방에서 나는 태풍 한가운데 있다고 생각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그렇지만 태풍은 지나가니까. 지금은 뭘 하려고 하지 말아야지. 버텨야지. 조용히 버티면서 돈을 모아야지. 그리고 상황을 바로 잡아야겠다. 지금 말고 나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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