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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마디 Oct 22. 2023

대출도시 서울

대를 이은 서울살이

알고 보니 서울살이는 대를 이은 욕망이었다. 내가 아직 없던 젊은 날의 엄마 아빠 역시 서울에서 살고 있었다. 아빠는 용산에서 태어났고, 엄마는 10대 후반에 할머니와 포천에서 도봉구로 왔다. 엄마 아빠는 20대 후반에 만나 30 언저리에 결혼하고 용두동에서 오빠를 낳아 길렀다. 30대. 지금 내 나이. 나의 부모도 지금의 나처럼 팔팔할 때는 서울에서 어떻게든 버티며 살다가, 88 올림픽을 앞두고 서울의 판자촌이 불도저로 헐리고 집값이 미친 듯이 뛸 때 못 버티고 서울 밖으로 튕겨나갔다. 그리고 엄마가 마흔이던 1990년. 충주시 엄정면 아빠가 직접 지은 작은 집에서 과수원집 딸로 내가 태어났다.


<그래프>


서민에게 일생에 몇 억, 몇 십억 단위의 돈을 지출하는 항목은 건물이 유일할 것이다. 월급만 모아서는 평생 벌지도 모으지도 못할 돈을 집을 소유하는 데에 쓴다. 집이라는 게 기본이 되는 방, 주방, 화장실이 붙어있냐 떨어져 있냐 하는 비슷한 구조일 뿐인데 천지 차이의 액수를 생각하면 비현실적이다. 지폐로 세 본 적 없는 양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비현실적이다.


오토바이는 넘어진 흔적만 있어도 반값으로 떨어진다는데. 집은 사고팔면서 계속 값이 오른다. 집에는 과거가 없고 미래만 있을 뿐이다. 허물어져가는 낡은 아파트에 재개발 확정 플래카드가 걸리면 가격이 배로 뛴다. 그때부터는 이 아파트가 신축 아파트로 보이는 것이다.  

 

서울 도시 역사 공부를 하며 <버블 패밀리> 다큐멘터리를 봤다. 다큐 속 감독의 부친은 포항 조선소 노동자였다가 아파트 매매 시세차익의 맛을 알게 되어 판을 키워 서울로 올라오셨다. 부부는 80년대 말~ 90년대 초 노태우 김영삼 대통령 시대에 중소 건설사를 운영하며 전국에 집장사를 했다. 지으면 팔리고 지으면 팔리던 부동산 호황기를 타고 이 가족은 당시 중산층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올림픽 선수촌 아파트에 입성해서 감독은 공주 같은 유년기를 보냈다. 그러다 1997년, IMF가 터지면서 부동산 버블과 함께 가족의 꿈도 터지고 말았다.


내가 태어난 1990년. <버블패밀리>가 잠실에 입성할 때 나의 패밀리는 서울에서 쫓겨나 충청도에서 다시 시작했다. 그렇게 나의 유년은 충북에서 차츰 경기도로, 10대는 충북과 경기도의 경계선을 넘어 말어 하면서 총 20년을 보냈다. 수도에 인접한 경기도에서는 3-4년이 지나면 집 값이 올랐다. 그러면 아빠는 그 집을 팔고 다른 동네로 떠났다. 문제는 아빠가 집 한 채를 가지고 사고팔고 했다는 것이다. 3-4년마다 부동산 광풍이 불었던 것일까? 아니다. 깡 시골의 외딴집이 아니라면 물가 상승 때문에 그 정도는 오르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점점 좋은 집으로 갔느냐? 아니다. 다른 집도 똑같이 올랐기 때문이다. 늘 고만고만한 오래된 주택이나 빌라에서 살았다. (나는 아직도 서울에서도)


“아빠가 이 나이에 어디서 이런 목돈을 벌 수 있겠니?” 75세의 아빠. 지금은 그 말이 수긍이 간다. 두 번째 문제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그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나는 일 해서는 돈을 못 모을 거라는 생각. 1949년 한국 전쟁 중에 태어나 피란길 할머니 등에서 보낸 아빠의 유년과 군사통치 아래서 보낸 청년시절을 이제는 알기 때문에 아빠가 그 허들을 넘기 어려웠을 거라는 걸 안다. 튼튼한 경제능력이 없는 아빠가 집을 돈 벌기 수단으로 삼은 것은 10년 단위로 대한민국에 휘몰아치는 부동산 광풍 덕분이었다.


<그래프>

서울 데이터

1986년 말~ 1990년 2월까지. 3년 2개월 동안 전국 도시지역 주택 매매가격은 47.3%, 전세 가격은 82.2% 올랐다.

서울의 매매가 지수(매매 대비 전세) 1986년~1990년 5년 동안 정확히 2배가 올랐다.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서 각각 주택 500만 호 (1980년), 주택 200만 호 (1989년) 건설로 수도권의 주택보급률을 늘려 집값을 방어해보려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인구가 더 몰리며 오히려 서울 경기 집값의 폭등을 가져왔다. 기술이 없어도, 학력이 낮아도, 돈을 끌어모아 1985년쯤 서울에 집을 살 수만 있었다면 5년 후에는 2배가 된 목돈을 만질 수 있던 시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면? 매매가 50% 오를 때 전세는 100% 올랐다. 정확히 두 배가 된 것이다.


<우리 또 이사가?> 신문 기사


1년 전세계약 시대에 그 말은, 자고 일어나면 전세가가 오르는 세상에서 재빠르게 목돈을 마련해서 자가를 확보 못하면 1년에 한 번씩 쫓겨나고 같은 돈을 가지고서는 점점 작은 평수로, 지하로, 변두리로 가다가 결국은 우리 부모님처럼 서울에서 튕겨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전쟁 같은 시대였다. 집값은 도시라는 생태계가 경쟁력 있는 개체만 살아남게 하는 개체 수 조절 방법이다. 아빠가 이 혹독한 시기에 뼈에 새긴 교훈은 <제1장. 집은 사야 한다. 제2장. 집은 돈이 된다. 그래서 더욱 집은 사야 한다>였다.


(2020년) 여전히. 누군가는 자본금 20%만 가지고도 영끌해서 아파트를 사서 3년만 이자 내며 버티면, 아니 자본금 없이도 갭투자로 깡통 전세를 내놓고 그 전세금으로 다른 아파트를 사놓으면 가격이 1.5배가 되어 시세 차익을 남길 수 있는 서울에서. 나는 그 기간 전세 원룸에 살았다. 1억으로 구할 수 있는 투룸 전셋집의 허름한 몰골을 보고 나와서는 집 가는 전철에서 친구들의 신도시 신혼집 신축 아파트가 계속 떠올랐고, 그 집 남편의 신형 SUV와 내가 탄 전철칸이 겹쳐지면서 뒤쳐지고 있다는 생각이 철커덩 철커덩 소리를 타고 끝도 없이 따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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