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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마디 Sep 18. 2022

H동, 1억, 15평, 투룸

내 집이다, 내 집이야.

1. 강을 건너 한강 이남으로

금요일 저녁에 한 부동산에서 문자가 왔다. H동 전세 1억, 15평, 역 5분 거리, 3층 투룸. 엊그제 공사 싹 끝냈음.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아침에 일 마치고 바로 넘어갔다. 전철로 강을 한참 동안 넘어가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네이버 지도에서 출발 도착을 찍었을 때 초록선이 서울을 길게 가로지를 때면 새삼 서울의 크기가 실감 나는데 이번엔 긴 세로선으로 한강을 넘는다. 25킬로 거리가 길고 길게 느껴졌다.


“저는 프리랜서라 회사 안 가고 집에서 재택 해서요,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요. 지역 상관없이 서울 안에만 있으면 되는데 내년엔 취직할 거라 출퇴근 생각해서 역이랑 가까우면 좋고요. 방 하나를 그림 작업실로 쓸 거라서 창문이 커서 환하고 앞뒤가 트이고 환기도 잘 되면 좋겠어요. 외국인이 많거나 술집 많은 동네는 시끄러워서 싫더라고요. 또 옆집이랑 너무 다닥다닥 안 붙어있으면 좋겠어요.”


이 많은 조건을 집을 보고 나서 부동산에 와서 말했다. 모든 게 다 들어맞는 집이라서.


1. 갑구가 깨끗해. 덧붙이거나 쪼개고 이은 구조물 하나 없이 정직하고 깔끔한 건물.

건물 자체는 상당히 오래됐지만, 전세대출 가능한 집답게 - 한 명이라도 더 들이려는 간이 구조물 없이 깔끔하게 홀홀 할아버지가 된 건물이 마음에 들었다. 4층 건물에 1층에는 상가 2개 치킨집과 호프집, 2,3,4층은 집이 한 채씩만 있는데 2층은 집주인 아저씨 사무실, 3층은 나 혼자, 4층도 세입자 1인 가구이다. 앞뒤로 시끄러운 이웃집에 질려서 도망 나왔더니 이렇게 주위에 이웃이 아예 없는 집으로 와버리다니.


2. 을구도 깨끗해서 집에 저당권이나 대출도 없었다.

공시지가에 비해(2억) 집을 훨씬 싸게 내놨다고 들었다(1억). 1층 4층은 다 월세라서 건물 전체에 걸린 보증금이 별로 없었고 그 말은 그만큼 집주인이 여기저기서 대출받지 않고 자기 자본으로 집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 빌라 전세 사기를 검색하면 하루아침에 경매로 집이 넘어갔다는 별별 사연이 많은데, 이렇게 집주인이 대출 없이 소유한 집은 그런 식으로 집을 갑자기 팔 일이 없다고 보면 된다.

게다가 집주인이 임대사업자라서 1년에 5% 이상은 전세금 인상도 못한다. 임대사업자 중에 자기 건물에 불법 증축 안 하고, 세금 잘 내고, 갑자기 임대료 올려서 세입자 고생 안 시키는 착한 임대인에게는 나라에서 세제혜택을 준다. 한마디로 세입자는 살면서 전세금 오를까 걱정, 이사 나갈 때 집주인이 돈 떼먹을까 걱정을 (거의) 할 필요가 없는 옵션이다.


임대사업자 혜택은 몰랐는데 덤으로 생긴 옵션! 전세대출을 내주는 정부기관은(중기청, LH 등) 빌려준 대출금을 반드시 회수하기 때문에 의심스러운 건물에는 대출해주지 않는다. 저렴한 데다 전세대출까지 되는 집을 찾기는 진짜 바늘구멍이지만 막상 찾고 나면 이렇게 든든하다.


3. 역 바로 옆에 초등학교가 있고 10분 거리에는 아늑한 시장이 있다. 대학교든 회사든 젊은이들이 타 지역에서 매일같이 몰려와야 그들의 위장과 마음의 허기를 채워줄 술집 맛집도 생기는 건데, 기본적으로 주택만 있는 동네라서 대학가 먹자골목 같은 게 없다. 이런 점이 놀기 좋아하는 사람에겐 아쉬울 수도 있지만, 술도 안 먹고 배달음식도 안 시켜먹는 나한테는 밤마다 술 취해서 소리 지르고 아무데나 분뇨를 싸지르는 사람 없어서 완전 좋아!


4. 이 동네도 서울 끄트머리라서 막바지 서울 확장이 활발했다. 건너편 경기도 위성도시는 진작에 자리를 잡고 원래 허허벌판이었던 땅에 북한 열병식처럼 오열을 착착착 맞춰 아파트를 쌓아 올렸다. 도시 초반에는 미분양도 많았다는데 요 몇 년 서울 아파트 값이 미친 듯이 오르면서 서울 주변 위성도시 집값도 덩달아 칼춤을 췄다. 그때 대출받아서 미분양 아파트를 사놓은 누구누구 남편이 지금 승자라고 친구들끼리 입을 모아 말한다.

그리고 그 옆에 딱 붙은 서울, 이 동네. 큰길을 기준으로 이쪽저쪽 동이 나뉘는데 저쪽의 Y동에는 1군 브랜드 아파트가 화려하게 들어섰다. 캐슬, 힐, 레이크사이드, 온갖 유럽 저택의 단어를 가져다붙인 아파트 성벽이 나지막한 H동을 내려다본다. 꼬맹이 H동은 담벼락에 매달려 불꽃놀이를 구경하듯이 Y동을 바라보고 있다. 우리도 곧..! 곧 터지겠지..! 하면서.



5. 집은 1자로 거실-작은방-큰방이 차례대로 있다. 거실을 가운데 두고 방이 퍼지는 구조가 아니라 방을 마주 볼 수 없어서 가족이라면 서먹해질 수 있겠지만, 나는 침실과 작업실로 구분해서 쓸 거니까 내 생활패턴에는 잘 맞을 것 같다.


거실의 양쪽 창문으로 한쪽은 찻길, 한쪽은 동네가 트여있다. 동네쪽으로 열린 동쪽 창문에서는 아침 해가  들어올 것이다. 창문을 열면 집들이  고만고만하게 낮아서  시원하게  뚫린 하늘이 보인다. 창문 아래에 요가매트를 깔고 햇빛을 흠씬 쬐며 몸을 쭉쭉 뻗어내고싶다.

길쪽의 서쪽으로도 거실, 작은방,  방에 창문이 하나씩 있어서 맞바람 치도록 환기시킬  있다. 1층의 호프집에서 저녁이면 치킨냄새 올라올거고 사람들 시끄럽겠지만 그럴땐 문을 닫으면 된다 (부럽다는 친구도 있었다). 길가라 사람들 눈을 피해 눈치껏 열어야 하고 늦게까지 차가 다녀서 시끄럽겠지만 배낭여행  익힌 귀마개 스킬이 있어서 귀마개만 끼면 어디서든  자니까 괜찮다. 신호등과 가로등이 창문 바로 앞에 있어서 밤에도 환하겠지만   창문 앞에는  4 건물보다 높은 은행나무가 있다. 낮에 창문을 열면 방 안으로 초록빛이 쏟아진다.


넓고 환한 집. 엄마는 창문이 커서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울 거라고 걱정에 걱정을 했지만 어떤 집에 살아도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지 않을까? 햇살이 집 안을 가득 채우는 집에서 거실에는 이불을 빨아 널고, 큰 방에서는 이젤을 펴 놓고 물감 그림을 그릴 생각을 하니 행복해졌다.


사람들은 자고 일하는 거 외에 집에서 뭘 하고 시간을 보낼까? 넓은 집에서 집 꾸미고 사는 재미를 나도 이젠 알고 싶어서 이 집에 오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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