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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마디 Sep 12. 2022

냉장고 방

마음 둘 자리

엄마가 이사를 하고 나서는 뭔가 필요한 게 있을까 해서 자주 집에 가보게 된다. 거실에는 아직 에어컨과 티브이만 있어서 휑하지만 거실은 대외용이고 실상은 방이 문제다. 아직 박스에 담긴 짐들이 나와 눈이 마주치면 ‘저기요… 저 여기 있는 거 맞아요?’ 하고 묻는다. 적절한 가구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정리라는 게 별거냐, 문짝 달린 가구를 사서 안 보이게 다 때려넣고 문 닫는거지. 물건이 자기 자리 없이 뭘 꺼낼 때마다 이리저리 밀려다녀서 어수선하기만 하다.


1. 자리

방 셋 중에 안방은 엄마방, 중간방은 오빠 짐 방으로 어수선한 상태지만 제일 구석 작은 방은 단 세 개의 물건만으로 제 몫을 끝냈다. 냉장고 셋. 양문형 냉장고 하나, 김치냉장고 둘. 김치 냉장고 하나에는 계절별 김치가 있고, 더 작은 김치냉장고는 문턱에 두고 엄마가 수시로 꺼내먹는 걸 담아놓는다. 탄수화물 드링크, 한약 파우치, 과일과 채소, 국수, 내가 오면 먹으라고 꺼내놓은 (본인은 생전 안드시는) 참치와 스팸 캔.



하마같은 기계 셋이 작은 방에 꽉 차서 여름 내내 이 방은 한증막 같았다. 방문을 닫고 뒷베란다로 뚫린 창문을 연 채로 종일 선풍기를 돌리고, 뭘 꺼낼 때는 발바닥 데일 세라 호다닥 꺼내왔다. 그래도 엄마는 넓은 주방과 냉장고 방을 하나 통째로 가지게 된 것을 뿌듯해했다. 이전 집에서는 냉장고 두 대만으로 거실 겸 주방이 꽉 차서 거실이라고는 싱크태 끝에 붙인 식탁 자리가 전부였다. 김치 꺼내려면 문 열고 베란다로 나가서 끙끙대며 김치통을 가져오고.


엄마는 이제 넓은 공간을 누비면서 요리를 더 크게 벌려놓고 한다. 인터넷으로 한약재를 골고루 시켜서 늘어놓고 말리고, 손이 많이 가는 약밥도 자주 해준다. 이번 여름에 엄마 집에 가면 며칠씩 지내다 오곤 했는데 매일매일 엄마와 저녁을 차려 먹는 것이 중요한 일과였다. 엄마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마중 나가서 마트에 들러 저녁거리를 사 온다. 집에 오면 엄마를 곧장 씻으라고 욕실에 들여보내고 나는 찬거리를 손질한다. 내가 요리 블로그 보면서 지지고 볶는 동안 씻고 나온 엄마가 수저 밥그릇을 챙기고 “엄마 우리 거실에서 먹을까?” 하면 “그래 에어컨 아래에서 먹자~” 하고 상을 펴고 앉아 배를 두드릴 때까지 먹었다. 그럴 땐 냉장고방에서 거실까지가 엄마의 주방이 된다.


야근 마치고 퇴근하는 아침. 엄마 마중.

(여름)


(엄마 집에서 해먹은 것들 기록)




2. 부모는 너에게

“일부러 상처를 주려고 그런 건 아니다. 정말 어쩔 수 없었던 거다. 그 방법이 최선이었던 것이다. 부모는 최대한 할 수 있는 만큼 양육에 최선의 노력을 한 것이다.”

내가 살아온 것처럼.


지난 2월 엄마와 싸운 날, 내게 상처 준 걸 왜 인정을 안 하냐 박박 우기다가 나가떨어지고 나선 나의 불안함이 가스 새는 집에 누가 불을 붙인 것처럼 펑 터져버렸다. 엄마가 ‘너 다 지난 일로 왜 그러니’ 조금만 한심하다는 듯이 말해도 내 안의 불안함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언제라도 엄마가 그때처럼 나를 공격할 것만 같다는 생각에 겁에 질려 울곤 했다. 회기동 작은 방에서 엄마의 티끌만 한 말에도 가슴이 다 터져서 산산조각 나 버리는 서른셋의 나를 견딜 수 없어서 그제야 정신과를 찾아갔다. 근데 마음 아픈 현대인들이 왜 이리 많은지 다들 2주나 뒤에 예약이 되더라.

얼마 뒤 치과에 갔다가 엘리베이터에서 두 층 위에 정신과가 있는 걸 보고 거길 먼저 들렀다. 마침 그날은 예약 없이 선착순 진료를 하는 날이라 나도 조금 기다렸다가 바로 진료를 볼 수 있었다. 응답하라 1988의 택이 아버지 같은 인상, 푸근하면서도 눈매가 날카로운 선생님이 상담을 해 주셨다. 보통 정신과에서는 내담자에게 오구오구 해주고 끝난다는데 택이 아버지 선생님은 아주 객관적인 관점으로 내게 부모의 입장을 전달해주었다.


당시에 저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너무 억울했다. 상대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면 상처는 내가 그저 감당할 몫인가? 그땐 너를 키우느라 그랬어, 그땐 그렇게 해야 하는 줄 알았어,라고 하면 자식은 용서해줘야 하는 건가? 혼란스러웠다. 게다가 선생님은 다른 날 상담에서 ‘억울하면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봐야 한다’는 말까지 하셨다. ‘내’마음을 왜 몰라줘!! 하는 게 억울함인데 그럴수록 ‘저’ 사람 마음을 알아봐야 한다니. 하지만 ‘쟤는 도대체 나에게 왜 그럴까?’싶으면 ‘쟤는 왜 그랬을까?’하고 그 입장을 헤아려보라는 말이 이치에는 맞았다. 그러나 해볼 엄두는 안 났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나면 내 상처도 타당한 일이 될 것 같아서. 그러면 정말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상담 3 회차쯤, 그때는 엄마가 나에게 막 사과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딸아, 그때 너의 마음을 몰라줘서 미안하다’

‘아무리 화가 나도 부모가 자식을 그렇게 대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그때는 내가 호되게 해야 네가 나쁜 방향으로 엇나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다 잊고 용서하라는 말은 못 하지만 네가 감정을 다 풀어버리고 싶을 때 언제든지 그렇게 다 쏟아내도 돼’


미안하다는 사과를 받으니 더 이상 미워할 이유가 사라져서 또 한동안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그 말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부모는 최선을 다 한 거라는 말. 나도 여태껏 정말 최선을 다해서 살았지만 바라는만큼 된 적이 있었나? 지나고 보면 방향은 뒷전으로 무작정 달릴 때도 있었고, 도중에 이런저런일로 산만해져서 흐지부지 될 때도 많았으니까. 나의 실패를 떠 올리고 나니까 엄마의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이 진심이었음을, 책임을 회피하거나 변명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엄마도 최선을 다했음을 알게 되었다.



3. 마음 둘 곳

엄마는 기분이 좋으면 옛날 할머니와의 얘기를 꺼낸다. 내게서 ‘딸’이라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보통 엄마는 100번도 더 한 얘기를 하지만 매일 밥을 같이 먹으니까 처음 듣는 얘기도 하나 둘 나온다. 엄마는 나를 마흔에 낳았는데 외할머니도 그 시절 마흔에 엄마를 낳으셨었다. 외할머니는 일제시대 18살에 시집을 가셔서 외삼촌을 낳으시고는 외할아버지를 징용에 빼앗겨 10년 넘게 생이별을 하셨다가 해방되고 다시 만나셨다. 할아버지가 간도에서 새로 얻어오신 작은할머니와 함께. 작은할머니의 딸인 이모들 말로는 할머니는 늘 “자네나 나나 남편복이 없네. 우리끼리 싸우면 뭐 할까, 힘든 거 있으면 내게 털어 놓으시구려’ 하며 작은할머니와 소주를 기울이셨다는데 엄마 또한 한 번도 작은할머니에 대해 불평한 적이 없다. 오히려 손아래 동생들이 줄줄이 생겼으니 어려서는 한 집에서 치고받고 자란 사이는 아니지만, 어느새 엄마의 손 위 어른들은 하나 둘 떠나시는 지금. 엄마는 동생들을 의지하고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엄마는 어려서 할머니와 둘이 살았는데 어떤 날에는 할머니가 웬 언니를 데려왔다고 했다. 아마 부모가 일찍 돌아가셨거나 무슨 사정으로 떠나서 집에 홀로 된 아이였을 것이다. 엄마보다 몇 살이 많아 벌써 여자 티가 나는 나이라 혼자 있다가는 누가 채갈 것 같아서 할머니가 시집갈 때까지만이라도 데리고 살아야겠다 싶으셨나보다. 그렇게 얼떨결에 그 언니까지 한 방에서 셋이 살게되었다. 그러다가 몇 년 후 그 언니는 훌쩍 마을을 떠났는데 다시 몇 년 뒤에 다섯 살 난 남자애를 데리고 돌아와서는 할머니에게 맡기고 또 떠났다. 할머니도 영문은 모르지만 일단은 아이가 딱하니까 또 밥 먹이고 키웠는데 얘가 말도 지지리도 안 듣고 밥도 안 먹고 정말 고집도 그런 고집불통이 없었다는 거다. 그러다 일곱 살이 됐을 때는 자꾸 집을 나가서 저녁에 밥 먹으라고 불러도 안 오고 동네를 뒤져 겨우 찾아내면 남의 집 담벼락 밑에 얼룩진 얼굴로 쭈그리고 앉아있던 아이. 아이가 너무 보기 안되어 결국 할머니는 그 언니를 수소문해서 맡긴 지 이태 만에 아이를 다시 데려가게 했다.


엄마는 그 아이 머리통이 찌그러져있었다면서 ‘너 대갈통 찌그러진 사람이 얼마나 고집불통인지 모르지? 관상이 진짜 그렇다’ 하며 가여운 아이를 회상했다. ‘엄마! 애기한테 대갈통이 뭐야 ㅋㅋㅋ’ 엄마 얘기를 듣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부모에게서 자기 자리를 못 찾는 아이들의 초라함과 처량함. 담벼락 밑에 쪼그려 앉은 대갈통 찌그러진 아이를 연기하는 엄마가 웃겨서 수첩에 그리다가 둘 다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는 그 아이 지금은 잘 살겠지 하고 둘이 엉엉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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