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삿날 잠수교가 잠길 뻔했으니까!
6월 30일 이 날을 똑똑이 기억한다. 6월 29일 아침, 도서관에서 밤을 새우고 오는 길에 내 전동 킥보드가 똑하고 멈췄기 때문이다. 짐 싼 채로 두 달을 지내는 동안 온갖 소모품이 이사날짜 맞춰 다 떨어진다. 휴지, 샴푸, 로션, 비누… 새로 사 오면 짐 늘어나니까 손톱만 한 것 겨우 쓰면서 연명하고 있는데 마지막 날에는 매일 타던 킥보드까지 고장이 나서 다신 안 켜졌다. 참나.
29일 하루 종일 집 정리를 하고 새벽에 누웠을 땐 비가 오기 시작했다. 비가 세차게 쏟아지는 이삿날 아침, 아빠가 양평에서 서울까지 와 주었다. 지난번 아빠를 만났을 때 배즙 한 박스를 가져왔다는 얘길 엄마한테 했더니 ‘으이구 너네 아빠는 맨날 뭘 그렇게 무거운 걸 들고 다닌다?’ 했는데 이번엔 이사 선물이라면서 무거운 도자기 화분을 네 개나 가져왔다. 짐을 하나라도 더 버리는 판국에 화분이라니 못살아 진짜. 역에서부터 한 손으로는 우산을, 한 손으로는 화분 박스를 실은 다이소 카트를 집까지 비틀비틀 끌고 오면서 아스팔트 바닥에 세 번은 엎었다. 못살아 진짜! 소리가 나올 때마다 ‘아유 아버지! 이사 선물 이렇게 가져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시네요!’ 우산 속에다 외쳤다. 웃음이 났다.
사실 6월 30일의 비는 진즉에 예정된 거였다. 내가 6월 말일에 이사 가는 걸 아는 사람들이 다 괜찮겠냐고 걱정했는데 나는 비라는 게 좀 오다 마는 건 줄 알았지. 그런데 그날은 밤새 쏟아진 비에 아침부터 서울시대 한강대로가 다 막히고 잠수교 교량 끝까지 물이 꼴딱꼴딱 차올랐다. 만약 내가 집주인에게 앙금이 없었다면, 하루 이틀 더 있다가 비 그치면 나가겠다고 했을 텐데 그 집에 하루도 더 있기 싫은 내 고집이 나랑 아빠랑 기사님까지 힘들게 했다.
얼굴에 ‘나 성실’ 쓰여있는 기사님이 오후에 오셨고 아빠와 셋이서 열심히 트럭에 짐을 실어서 네시쯤 비가 조금 잦아들 때 얼른 회기동을 떠났다. 그래. 하루 종일 내렸으니 저녁때는 좀 그치겠지, 했는데 웬걸, 올림픽대로를 건너는데 저 멀리 롯데타워가 뿌옇게 보일 정도로 비가 쏟아졌다. 비가 와장창창 쏟아지는 한강대교를 이삿짐 트럭을 타고 달리는 상황에 웃음이 났다. 땀 흘리며 짐 옮기고 비까지 쫄딱 맞은 우리 셋에게 누렁이 냄새가 났다. 웃음이 났다. 기사님도 황당했는지 오늘보다 더 기상천외한 이사 에피소드를 풀어줘서 셋이서 나란히 깔깔대며 올림픽대로를 건넜다. 신나게 돌아가는 와이퍼가 우리의 불안함을 자꾸자꾸 닦아냈다.
어둑어둑해져 H동에 왔을 때는 빗줄기가 아스팔트 때리는 소리가 섬뜩할 정도였다. 약간 겁에 질려서 1층 치킨집에 들어가 한 시간쯤 쉬고, 비가 잠시 잦아든 틈을 타 셋이서 열심히 계단을 오르내리며 짐을 다 날랐을 때는 6시가 훌쩍 지난 시간이었다. 자상한 기사님이 세탁기 설치까지 봐주셔서 덤을 보태 계좌이체를 하고 기분 좋게 보내드렸는데 또 웬걸, 큰 방 천장에서 물이 새고 있었다. 그때도 밖에선 여전히 비가 때려 붓는 중. 새 집에 물이 샌다니… 진짜 못살아!
일단 저건 나중에 방수공사를 해야 하니 물 떨어지는 곳에 플라스틱 박스를 받쳐두고 아빠를 집에 보낼 준비부터 했다. 아빠는 귀찮다고 그냥 가겠단다.
“아빠! 우리한테 누렁이 냄새난다고! 제발 씻고 가~! 전철에서 젊은 사람들이 싫어해!”
“노인들이 다 그렇지 뭐~ 경로석에 쭈그리고 앉아서 가면 돼~”
“아 제발!! 제발 씻고 가! 제바알~!”
두 손을 싹싹 빌며 씻으라고 비니까 아빠가 웃으면서 들어갔다. 대충 물만 끼얹고 나온 아빠를 다시 들여보내서 머리 샴푸도 시키고, 금세 또 나온 아빠에게 칫솔을 쥐여 다시 들여보내서 양치도 시켰다.
뽀송한 아빠에게 입힐 큰 옷을 꺼냈다. 바지는 얼마 전에 사이즈 잘못 시킨 추리닝 바지를 입혔더니 배 나온 아빠 허리에 딱 맞았고, 위에는 박시한 긴팔 분홍색 티셔츠를 입혔는데 알고 보니 옆구리가 길게 찢어진 야시시한 디자인이라서 아빠가 허리를 숙일 때마다 옆구리로 뱃살이 다 보였다. 어쩔 수 없이 티를 바지에 넣어 배바지로 입히고, 이집트에서 얻었던 남색 낚시모자도 씌우고, 내 신발 중 가장 큰 255 운동화도 구겨서 신겼다. 분홍색 칠부 티에 배바지를 입고 작은 모자를 눌러쓰고 뒤뚱뒤뚱 걷는 아빠가 얼마나 웃기던지. 여전히 쏟아지는 비 속에 각자 우산을 쓰고 역까지 걸어갔다. 역 앞 편의점에서 쌍화탕과 파스를 사서 아빠에게 건네고, 아빠는 나 이사비용에 보태라고 지갑에서 30만 원을 꺼내 줬다.(굿 딜인걸). 플랫폼까지 같이 들어와서 아빠 전철을 태우고 경로석에 앉는 걸 보고 문이 닫힐 때 손하트로 작별인사를 했다.
집에 와서 화장실에 들어가니까 아이쿠, 도시가스 신청을 안 해서 찬물밖에 안 나오더라. 너무 추웠다. 그리고 집을 오래 비워서 그런지 하수구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빠가 그래서 자꾸 대충 씻고 뛰쳐나왔구나, 몰랐어. 그것도 모르고 계속 잡아넣었어. 아빠 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