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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마디 Sep 06. 2022

혼자 걷기 좋은 동네

1. 걷기 좋은 동네


이 동네에 오고나서 밤에 오래오래 걷는다. 2-3키로는 보통 걸어다니고, 평소 5km를 숱하게 달려서인지 선선한 날은 잠실에서 집까지 5km가 가깝게 느껴서 선뜻 걸어가기로 한다. 전철역 사거리만 지나면 길에선 활자가 사라지고 상점도 집도 빡빡하지 않고 버스는 조용히 지나간다. 핸드폰을 가방 깊숙히 넣고, 아무것도 쥐지 않아 홀가분한 두 손을 허공에 휘적대며 세월아 네월아 걷는다. 고개도 자유로워 어디든 돌려본다. 길건너 외제차 센터의 두꺼운 통유리창에서 엄중한 불빛이 스며나온다. 그 옆엔 젊은 여인들의 욕망이 곡선을 타고 흐르는 필라테스 짐. 그리고 위를 올려다보면 계절마다 은행잎이, 벚꽃이, 목련이  가로등 불빛과 뒤섞여 이 길끝에 다다를 때까지 내 머리맡에서 오늘의 계절을 알려준다. 가을이다 선영아. 겨울이다 선영아. 봄이다 선영아.

이사간 동네는 어떻냐는 말에 나는 걷기 좋은 동네라고 답한다. 곳곳의 공원를 두른 산책로가 참 잘 깔려있고 일반 도보도 넓직해서 뛰고 걷기 좋다. ‘살기 좋은 동네’. ‘살기좋은 동네’란 뭘까. 사람마다 동네에게 바라는 것이 다를 것이다. 이전에 살았던 서울은 학교나 회사에 다니기 위해 선택한 위치였다. 빡빡한 빌라촌의 대방동, 크고작은 언덕의 오르막 내리막이 방심할 틈을 안 주는 회기동, 대한민국 정치경제종교 1번지의-(그림 : 기합이 빡 들어간-투스타 쓰리스타 포스타같은)-장성같은-빌딩이 오와 열을 맞춰 사는 광화문. 골목이 굽이치고 너무 좁으면 이웃과의 삶이 원치않게 자꾸 겹쳐서 모른척하고싶어진다. 또 길이 너무 넓으면 누가 지나갈지 모르기때문에 경비가 삼엄하기 마련이다 (1212쿠테타 때는 광화문 대로에 탱크도 지나갔다). 그런데 송파구의 길은 적당히, 큰 길도 골목길도 적당한 거리가 이쪽 저쪽을 나눈다. 그래서 걷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한다.



“잠실구획정리지구 340만평을 (종전과같은 낡은 수법이 아닌) 계획적 수법으로 멋지게 개발하라. (멋지게!). 그리고 그 한구석에 국제규모의 체육장 시설을 만들 것도 연구하라”라는 박정희 대통령 지시가 내린 것은 1973년 9월 하순이었다.  이렇게 누에 키우던 작은 섬 잠실을 ‘멋지게’ 개발하기로 하고, 이미 착공한 지 2년이 지난 잠실 구획정리사업이 중단되었다. 잠실지구를 계획적 신시가지로 조성하는 계획이 세워졌고, 그 서북쪽 구석에 12만평에 달하는 운동장 부지가 확보되었다. 잠실지구는 구획정리를 도시설계의 수법으로 개발한 대담한 실험장이 되었으며 그것은 그 뒤에 이어진 많은 구획정리사업의 시범이 되었다. 영동잠실 양지구의 모든 건축물이 건축규모 최소 20평, 건폐율 40%이다. 지금 강남 서초 송파구 건물들이 다른구에 비해 여유있고 부유한 고급주택으로 세워진 이유이다.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위치..)언덕위 굽이치는 골목에 살때는 하늘 보면서 걸을 수가 없다. 눈 앞이 지평선이 아니라 땅이다. 그런 골목을 찾아 들어갈때는 사람들이 일을 찾아 학교를 찾아 밀려들어 이 언덕까지 올라왔구나. 비탈길의 땅을 쪼개고 방향을 쪼개서 집을 다닥다닥 붙여올랐구나 싶다. 그런데 송파구의 길에서는 처음부터 사람들 여기에 ‘살으라고’ 동네를 깔아놨다는 은근한 자부심이 보인다. 천천히 보도블럭과 발맞춰 걸으며 이 동네에 스며들고싶다.’


그동안 회사와 학교를 먼저 정하고 근처로 이사갔다면, 코로나 팬데믹으로 줌 강의와 재택근무가 가능해지고는 처음으로 ‘살기' '좋은’동네를 '찾'았다. 2022년 여름 한강 이남에만, 특히 부자들이 몰려사는 강남이 물에 잠긴 것을 보고 살기 좋은 동네란 뭘까 다시 생각해야했지만, 아무튼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동네면 살기 좋은 동네일 것이다.



2. 혼자 살기 좋은 동네


혼자 살면서 밥먹듯 하는 생각은 “나 혼자 해야해. 나 혼자서 할 수 있어. 혼자 해 나갈 수 있어”


연말에 신청한 주택도시공사 전세금보증보험의 보완요청이 3월에야 왔다. 나 혼자 서류를 떼다 떼다 도저히 임차인은 알 수 없는 영역이 있어 찜찜한 마음을 무릅쓰고 임대인에게 연락했는데 왜 그걸 하려고 하냐며 한바탕 싸우기만 했다. 잔뜩 달아오른 열을 도서관 가는 산책길에 식히고 문득 다리 아래 공원에 벚꽃이 흩날리고 있길래 난간에 기대 잠시 쉬었다. “그래. 나 혼자 해야해. 어차피 아무도 대신 해결 못 해. 나만 할 수 있는 일이야. 남에게 폐 끼치면 안돼.” 하는데 갑자기, 너무너무 외로웠다. 이 생각이, 나 혼자 해야한다는 바로 이 생각이 나를 외롭게 하는구나! 하고 고개를 번쩍 들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고있었다. 만약 여기가 한강 다리였다면? 생명의 전화 1588-9191 …


애인이 있었으면 달랐을까? 애인이 없어지고 가장 큰 변화는 나의 생활패턴과 일상 속 특별한 일의 종류가 180도 달라졌다는 것이다. 평일과 주말 구분이 모호해졌다. 당연하게 다른이를 위해 시간을 비워놓는 일이 더이상 사라지고 모든 시간을 나를 위해서만 쓴다. 내가 밥먹는 것 집에 들어가는 것을 누구에게도 보고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칫하면 매일의 식사와 귀가를 잘 챙기지 않게된다. 매일 반복하는 사소한 일을 누군가와 나누지 않다보니 큰 일은 더더욱 상의하기 힘들어졌다.


한마디로 나만을 위해 자리를 떼어놓은 사람이 없다. 아마 애인이 있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그 친구에게 하소연을 많이 했을것이고, 은근슬쩍 나 대신 알아봐달라고 하고, 일이 안 풀려 원망할 데를 찾을 때 그 친구가 마침 잘 걸렸을 것 같다. 그래서 더더욱 만나고싶지 않고 가족도 이 진흙탕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가족 혹은 예비가족이 될 사람과 자꾸 관계가 틀어지는게 자꾸 내 탓인 것 같아서 내가 내 문제를 해결하고, 책임에서 동등한 상태에서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고싶다는 생각뿐. 매일 이런 다짐을 하며 혼자 잘 살아보려고 하는 데에서 외로움은 당연히 오는 거 아닐까? 외로움으로. 외로 있으므로, 외로 서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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