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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마디 Sep 19. 2022

함께 뛰기 좋은 동네


3월 어느 주말, 마라톤 대회를 구경하러 갔다. 종합운동장 종점에서 기다려서 골인하는 마라토너들을 구경하고싶었는데 늦게 갔더니 교통통제를 깜빡해서 잠실역 사거리에서 강제 하차 당해버렸다. 여전히 마라토너 행렬이 이어지고있다. 나도 그 행렬 에서 나도 같이 종점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그 시간대에 뛰는 이들은 프로선수가 아니라 나같은 일반 시민이다. 생업 사이사이 매일 도전하고, 버티고, 내 근육의 가동성을 조금씩 늘려가며 훈련하는 일반 사람들. 그들의 거칠고도 고요한 숨소리가 잠실지구를 메웠다. 그 공기에 취해 종합운동장까지 3키로 걷는동안 마음이 자유로웠다.


올림픽로에는 88올림픽때 세워진 종목별 거대한 조각상의 행렬이 중앙분리대 역할을 하고있다. 그 행렬을 볼 때면 나도 밖으로 나가고 싶고, 소리지르고 싶고, 엎어치고 메치고 던지고 달려나가고싶었다. 그래서 롯데타워 나이키 매장에서 러닝화를 사고 바로 성내천을 뛰었다. 혼자서 3km를 10번쯤 뛰고선 5km도 달리게 되고, 어느날은 사람들과 7:30페이스로 5km를 뛰었더니 힘이 남아돌길래 같은 페이스로 10km를 뛰어보고, 이제 10km는 5:40대, 20km는 6분대에 뛴다.

                    



보통 코스는 동네의 성내천, 그 끝의 올림픽공원이고 더 가서 한강공원까지 나가기도 한다. 졸졸거리는 시내 성내천이 한강 본류로 합류하는 길 내내 롯데타워가 함께한다. 시야 한 구석에서 30분, 1시간 내내 빨간 불빛을 밤 하늘로 쐈다가 사르르 별빛이 되어 쏟아지는 타워를 보고있으면 러닝이 낭만으로 가득찬다.


코로나 2년동안 주식 코인 광풍 속에서 사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특히 등산모임에 가면 서울 근교의 어떤 산에 올라도 롯데타워가 보였기때문에 아파트 숲 사이 삐죽 솟은 타워를 가리키며 죽기전에 언젠간 저기서 살아봐야되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꼭 있었다. 한 남자는 시그니엘의 최저가 층의 평당 단가까지 읊으며 자기가 1년동안 얼마를 모았으니 앞으로 몇년을 더 모으면 저기를 매입하겠다는 둥, 그러면 시그니엘 입주자만 갈 수 있는 식당에 우리를 초대하겠다는 둥(그날 처음보고 또 볼지 안볼지 모르고 통성명도 안 한 우리를) 타워 내부를 머릿속으로 생생하게 그리며 사는 듯 했다. 프리즌 브레이크 등짝에 새겨진 교도소 설계도처럼.




롯데타워는  희한한 건물이다. 원근법을 무시한다. 그래서 현실적이지가 않다. 10km 떨어진 위례에서조차  앞의 아파트보다  멀리 롯데타워가  높을 때도 있다. 맑은 날에는 80km 밖의 충남 천안에서도 보인다고 한다. 나도  동네에 이사오기전까지는 보통 멀리서,  위에서 타워를 감상했다. 서울 분지의 풍경을 둘러보다가도  그런 꼭지점에 시선이 꽂힌다. 그리고 한동안 넋을 놓고  점을 바라본다. 그저 시선이 간다는 이유로, 그게 부를 상징한다는 이유로, 괜히 갖고싶은 욕망에 휩싸이거나 구름  천상계에 사는 이들은 어떨까 이질감을 느끼게 된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성내천의 어떤 구간에서는 롯데타워가 시야에 한눈에 안 들어올만큼 높이 솟아있다. 특히 밤이되면 타워는 형체가 사라지고 허공에 붙은 불빛 군단뿐인데 뛰면서 위아래를 왕복하는 빨간 불빛을 쫓다가는 발을 헛디뎌 고꾸라질 수도 있다. 그래서 뛰는동안 롯데타워가 늘 시야에 있지만 보지는 않는다. 그저 옆에 있다. 한참을 달리다보면 다음 곡선의 구간에서는 방향이 틀어져 롯데타워를 등지고 뛰기도 하고, 조금 있다가는 다시 정면으로, 조금 있다가는 다시 옆에 두고 뛴다. 롯데타워는 그저 옆에, 저기 어딘가에 있다. 나는 롯데타워를 향해 달리는 것이 아니다. 쳐다보는 것만으로 고개를 뻐근하게하는, 내가 이루지 못할 아니 이루지 않을 부를 바라보며 허영심을 채울 필요도 없고, 누군가 꼭대기에서 나를 내려다본다며 초라함을 느낄 필요도 없다. 롯데타워는 그저 거기 있는 불빛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키로수를 채우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헉헉대다보면 잘 깔린 데크의 기둥들이 가리키는 소실점에 롯데타워가 있다. 위례에서는 내 앞의 아파트보다 롯데타워가 높더니, 성내천에서는 기둥과 자연스럽게 원근법에 맞춰 서 있는 롯데타워.


지난 3월 마라톤. 전국에서 모인 수만명의 사람들도 강북 광화문에서 출발해서 오는동안 모두가 롯데타워를 보며 달렸을것이다. 그러나 롯데타워에 도달한 순간 롯데타워를 지나쳐간다. 우리의 목적지는 롯데타워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의 피니쉬라인을 향해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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