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쓰면서 얼마나 많은 한숨을 쉬었는지 모르겠다.
나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 쓰기 시작한 글이, 사실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것 같아서 괴로울 때가 있다. 개발 이야기를 하면서 화가 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할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마음속에 담아두는 것보다는 털어내는 게 후련하지 않을까 싶어서 몇 자 적어 본다.
솔직히 다른 직종은 어떤지 모르겠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개발자는 끊임없이 신기술을 받아들여야 한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신기술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지만, 새로운 기술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정체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끊임없이 신기술을 공부한다. 게다가 즐거운 얼굴로 누구보다 빨리 새로운 기술을 짠 하고 적용하는 개발자라니, 멋지지 않은가. 이왕 개발자가 되었으니 멋진 개발자가 되어야 할 것 같고. 게다가 각종 비효율을 금방이라도 해결해 줄 것처럼 말하는 신기술을 보면 당장 적용해야 할 것만 같다. 뭐, 꼭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버벅거리고 느린 프로그램보다는 빠르고 쾌적하게 돌아가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지 않은가. 그래서라도 개발자들은 신기술을 익히려고 노력한다.
비효율적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신기술을 익히는 거라면 좋다. 그게 야근을 줄여주기도 하고, 매출을 올려주기도 하니까. 그런데 개발자들은 자기 분야의 거의 모든 신기술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물론,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시니어 개발자라면, 유연하게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넘어갈 건 넘어가는 융통성을 발휘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직 어떤 기술이 어떻게 적용될지 감이 없는 주니어 개발자나, 새로운 것을 익혀야 한다는, 그것도 신기술에 열광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는 경우, 자기 계발의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
"3화 - 개발이 행복하지 않았냐고요?"에서도 말했지만, 개발자들은 퇴근 후에도 개발책을 읽고, 토이 프로젝트, 코딩 테스트 연습을 하기도 한다. 개발 실력을 올려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기 시작하면, 그야말로 무궁무진하게 자신을 자기 계발의 굴레 속으로 밀어 넣을 수 있다. 압박감을 느끼는 이유는 다양하다. 누군가는 뒤쳐지고 싶지 않아서, 그저 나이만 많고 잔소리 밖에 할 줄 모르는 개발자가 되고 싶지 않아서 노력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연봉을 올려야 하고, 좋은 회사에 가야 하고, 그러면 유토피아에 입성할 수 있을 거라는 환상을 가지고 자기 계발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뭐든 지나치면 문제가 된다. 뒤쳐지고 싶지 않아서 자기 계발을 하든, 성공만을 위해서 자기 계발을 하든, 지나치면 삶을 갈아 넣게 된다. 그렇게 되면 삶의 의미가 마치 개발 밖에 없는 것처럼 변질되기도 하고, 가족과의 시간을 희생하기도 하며, 개발자로서의 성공 여부가 마치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것처럼 휘둘리기도 한다.
자기 계발의 말들은 참 화려하다. 'A급 인재가 돼라', '대체 불가능한 인재가 돼라' 등 말만 들으면, 내가 A급 인재가 될 수 있을 것 같고, 대체 불가능한 인재도 될 수 있을 것 같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될 것 같기도 하다. 다른 분야도 비슷할 것 같지만, 처음 개발 현업에 발을 들인 사람들은 종종 슈퍼 개발자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공부도 월등히 많이 하고, 업무도 열성적으로 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깨닫는다. 아,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너무 많구나. 나는 A급 인재가 될 수 없구나. 그런 깨달음을 얻으며, 연차를 쌓고 자연스럽게 A급은 아닌 보통의 시니어가 된다.
알고 있다시피, 대부분은 A급 인재가 아니다. 대체 불가능한 개발자도 무척 소수다. 하지만 회사는 늘 A급 개발자를 모신다고 홍보한다. 있는 개발자들을 정말 A급으로 대우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설령 진짜 A를 모아두어도, 그 안에서 또 B와 C가 생길 테니, 회사 입장에서는 모든 직원들을 A로 대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냥 소수의 인재들에게 보상을 몰아주며, 나머지는 당신들은 A만큼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몰아세우며 적당한 연봉을 지급하면 그만 아닐까.
그리고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B 아니면 C일 텐데, 그 많은 사람들이 A가 못 되었다고 고용불안에 떨어야 하고, 불행하게 살아야 하는 건 아니다. 하루하루 충실히 일하고, 사회에 기여했다면 그 사람들 모두 합당한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그들 모두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갈 자격이 있으며, 자기 삶을 소중히 여길 자격이 있다. 자기 계발 논리에 속아 A가 되지 못했다고 불행할 필요는 없다. A가 아닌 사람들을 비난할 필요도 없다. 개발자로서 서비스를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면, 그만큼 경력을 쌓은 것이고 합당한 보상을 받을 이유가 충분하다.
그렇다고 A급의 노력을 무시하는 건 아니다. A는 A가 되기 위해 나름대로 자기 삶의 일부분을 포기하고, 자기 행복을 내려놓았을 것이다. 그에 맞는 보상을 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A가 되기 위해 내려놓은 삶의 조각들과 행복을 어떤 방식으로 보상받아야 마땅한지 모르겠다. 엄청난 노력으로 돈과 명예를 얻을 수는 있겠지만, 그동안 잃은 시간과 행복을 보상받으려면 대체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야 하는 걸까.
자기 계발 논리는 덫이다. A급 인재가 되어야 한다고, 대체 불가능한 인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사람을 성공에 눈이 멀게 한다. 지나치게 성공에 매몰되다 보면, 자신의 삶을 고갈되게 하고, 스스로에게도 타인에게도 쉽게 패배자라는 낙인을 찍게 한다. 그리고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 자신을 채찍질하며 불행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다. 사실 오래 직장을 다닌 분들은 알고 있다. 무수히 많은 B와 C들이 애쓴 덕분에 회사가 돌아가고 있다는 걸. 그들 역시 가치 있는 일을 했다는 걸. 그리고 B와 C 역시 행복할 수 있다. 사실 그런 보통 사람들이 집을 얻고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어야 건강한 사회 아닐까. 소수의 A 만이 부를 독점하는 사회가 오히려 잘못된 사회 아닐까.
임포스터 증후군이라고도 하는데, 종종 직장인들이 겪는 증후군이다. 스스로가 과대 평가되고 있다고 느끼고, 재능이 없는데 마치 가면을 쓴 것처럼 재능 있는 척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고 느끼는 증후군이다. 칭찬을 받아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은 운이 좋아서 성공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게 특징이다. 사실 정말 잘하고 있는 분들이 이런 증후군이 있다면, 좀 안타깝다.
나 역시 가면 증후군을 앓았다. 진단을 받은 게 아니라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나 역시 경력을 쌓아왔고 나름의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늘 경력을 충실히 쌓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업무를 하다 벽을 만나면, 아 역시 내가 모자라서 그렇구나, 나는 별로 잘하지도 않는데 이런 회사에서 일하고 있구나, 하고 스스로를 깎아내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세상 멍청한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이전 회차에서도 이야기했듯, 나는 훌륭한 개발자가 되기 위해 자기 계발에 열을 올렸다. 하지만 노력한 만큼 잘 되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자기 의심과 자기혐오가 심했었고, 그 상태로 연차를 쌓다 보니, 내 경력이 물경력이라는 생각에 시달렸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는 서비스에 많은 기여를 했었고, 제법 괜찮은 성과를 냈는데도 그랬다. 어쨌든 처음에는 훌륭한 개발자가 되기 위해 자기 계발을 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내가 모자란 사람인 것 같아서 자기 계발을 했다. 거기에 회사 사정이 나빠지면서 재앙을 하나 맞이했는데, 그러고 나니 결국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알았다. 내가 가면 증후군이었다는 사실과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걸.
내가 믿어왔던 자기 계발 논리는 사실 허상이고, 잘하고 있는데도 가면 증후군과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걸 자각하고 나니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업무 외 시간에 자기 계발을 하는 게 당연시되고, 성과를 내고 있는데도 더 많은 성과를 못 낸다며 스스로를 괴롭혀야 한다니. 높은 연봉이나 회사 이름, 멋진 개발자 이미지 뒤에는 사실 착취에 가까운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아닐까. 설령 그 정도는 아니라도 나는 이 일을 계속하고 싶지 않았다. 업무가 끝나도 내 삶을 살아내기가 어렵다니. 물론, 퇴근 후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쉴 수 있지만, 내가 멈춰 있는 사이에 실력이 정체되어 있다는 불안감을 못 떨쳐 낼 것 같았다. 그 와중에 신기술은 계속 나올 테고, 모든 개발자들이 그 물살을 타고 빠르게 나를 스쳐 지나갈 것 같았다. 그걸 무조건 따라가는 게 옳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신경이 쓰일 게 뻔했다. 내가 이 상황을 빠져나갈 수 없다는 사실이 개발자라는 직업에 환멸을 느끼게 했다.
이게 내가 개발을 그만두게 된 중요한 이유이다.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는 개발자가 있다면, 가면 증후군 때문에 스스로 모자란 사람이라고 자책하고 있다면, 당신은 잘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지금 붙잡고 있는 업무를 잘 해내는 당신이 왜 모자란 사람인가. 그것만으로도 당신은 어엿한 개발자이다. 그러니 스스로를 깎아내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음 화에서는 결정적으로 개발을 그만두게 된 사건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회사의 헛발질로 인해 많은 팀원들을 떠나보내야 했던 일인데, 아마 흔한 재앙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흔한 재앙이라 더 무서운 일일지도. 현직 개발자들에게는 무서운 일이겠지만, 개발자의 불행을 적나라하게 바라보는 것도 어쩌면 더 나은 내일을 만드는 한 걸음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다음 화를 써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