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하고 멋진 이미지는 정말 이미지일 뿐
언캐니(uncanny).
사전에 찾아보니 "신비로운, 불가사의한, 으스스한, 기괴한, 기분 나쁜"이라고 나온다. 실제로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라는 용어도 있다. 인간은 인간을 어설프게 닮은 무언가를 보면 불쾌감을 느낀다는 용어인데, 이 단어를 차용한 제목인 <언캐니 밸리>라는 책이 있다. 실리콘 밸리의 불쾌한 실상을 꼬집은 책으로 IT 업계 사람이 읽으면 씁쓸한 뒷맛을 느끼게 하는 내용이 실려있다. 나 역시 개발자로 일하면서 느꼈던 불쾌한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언캐니 밸리라는 말이 가장 와닿았다.
내가 겪은 언캐니 밸리는 실리콘 밸리가 아니라 판교 테크노 밸리지만, 그곳도 나름 불쾌한 점이 있었다. 늘 새롭고 멋지고 쿨한 이미지와는 달리, 오히려 뒤틀린 자화상을 보는 기분이 가끔 들었다. 이번 화에서는 그 불쾌한 점과 관련해서 내 동료들이 줄퇴사한 사건을 살짝 적어볼까 한다. 쓰다 보니 괜히 트라우마를 건든 것처럼 괴로워지는데, 아마 이 글을 읽는 누군가도 괴로운 경험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안타깝게도 그리 드물지 않은 일이니 한 번쯤 이런 일도 곱씹어보면 언젠가 도움이 될 것이다.
내가 겪은 이야기이다. 모든 사실을 그대로 쓸 수는 없어서 조금 다르게 쓰긴 했지만, 이 이야기의 요지는 잘 드러날 것이다. 코로나 시대보다 더 먼 옛날. 스마트폰의 등장 이후, 크게 부흥한 스타트업들과 IT 업계는 지금과 비교도 되지 않는 호황이었다. 아마도 닷컴 버블 이후에 맞이한 아주 오랜만의 호황기가 아니었나 싶다. 코로나 시대에 극점을 찍고 점차 깊은 불황에 빠져드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시대였다.
내가 아는 임원 A는 그 시대에 개발자로 일했다. 당시의 임원 A는 일개 개발자로서 열심히 일하지 않았을까, 나는 그렇게 짐작한다. 설마 하니 처음부터 빌런이었을까, 하는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으로 그렇게 가정해 본다. 어쨌든 운이 따라주기도 했고, 본인도 열심히 일한 덕분에 A는 아주 작았던 회사가 엄청나게 커지면서 임원이 되었다. 회사의 초기 멤버라 스톡옵션도 많이 받았고, 회사가 상장하면서 부자가 된 임원 A는 그야말로 성공한 스타트업 개발자의 표본이 되었다.
승승장구하던 임원 A는 나름대로 열심히 일한 모양이었다. 100% 확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일개 개발자인 내가 높으신 분들의 복잡한 이야기를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회사 윗사람들 사이에 이런저런 정치가 있었고, 누가 어느 부서로 가버렸고, 누구는 무슨 사업을 맡게 되었고, 회사에 떠도는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몇 년 간 얼기설기 들은 이야기만으로는 임원 A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지 알 수 없었고, 사실 나와 직접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으니 설령 그의 이야기를 들었어도 그다지 기억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가끔 임원 A의 이름을 듣기는 해서, 그가 회사에 존재감을 드러낼 만큼은 일을 했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다. 그게 진짜 성과 덕분인지, 정치를 잘한 덕분인지는 내가 판단할 영역이 아닌 것 같다.
회사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임원 A를 본 적이 있었다. 나름 평등하고 쿨하고 멋진 회사였으니까, 임원 A는 직원들과 함께 편안한 분위기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영어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고, 농담도 하고 제법 괜찮은 분위기였던 걸로 기억한다. 사람들 표정도 좋았고, 딱딱한 분위기가 아니라 정말 편안한 자리로 보여서 나는 임원 A를 꽤 괜찮은 사람으로 보았다. 물론, 그때도 나는 임원 A와 아무 관련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냥 그런 사람인가 보다, 하고 지나쳤다.
내가 임원 A와 엮이게 된 건, 회사가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을 때였다. 나는 새로운 도전이 하고 싶어서 부서를 옮겼고, 임원 A도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렇다 해도, 일개 개발자인 나와 저 높은 자리에 앉은 A 사이에는 꽤 많은 부서장들이 있었기에, 직접 만날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 엄청난 거리에도 불구하고, 나는 임원 A의 온갖 삽질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말았다.
내가 있던 부서에서는 나름대로 제품을 잘 만들어보기 위해, 적당한 일정을 산정해서 이런저런 기능을 시험해 보고 제품에 붙일 계획을 세웠다. 꽤 많고 복잡한 기능이 들어가야 해서, 조금 빠듯해도 일정을 잘 나누고, 힘들겠지만 잘해보자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내 지근거리에 있던 조직장 들은 임원 회의에 다녀오고 표정이 굳었다. 임원 A가 우리 부서의 일정과 스펙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었다.
임원 A는 과도한 자신감이 있었다. 자신은 이 사업에 성공한 경험이 있다며, 자기가 해보니 이런저런 기능이 필요하다고, 과도한 스펙을 열거했다. 개발자부터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온 그가 한 말이니, 언뜻 들으면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현업에 있는 개발자들이나 기획자들이 검토해 보면, 지금 단계에서는 굉장히 불필요하고 제품이 이상해지는 스펙이었다. 심지어 임원 A는 그렇게 스펙을 잔뜩 늘려놓고는 일정은 단 한 달만 늘려주었다. 조직장들이 열과 성을 다해 불가능하다고 말했지만, 그는 전문성을 가지고 하라며 실무진을 타박했다. 대체 이 사람은 그동안 어떤 식으로 일을 해왔던 걸까?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평등 문화는 회사 내규로 정해놓은 게 아니면 박살이 나기 쉽다. 높으신 분이 억지로 밀어붙이니, 실무진은 죽어나갔다. 야근이 이어졌다. 실리콘 밸리에서부터 외치는 대단한 생산성과 좋은 개발 방식이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렇게 되면 누구 하나 행복해지지 못하고, 미쳐가기만 하는데. 제품은 원래 밟아나가려 했던 단계를 밟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둘렸다. 필수 기능이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고, 임원 A가 억지로 욱여넣으라고 했던 기능이 어설프게 들어갔다. 실무진은 대체 이게 무슨 제품이냐고, 우리가 만드려고 했던 제품이 이런 거냐고, 이게 출시 가능한 제품이냐고 분노했다.
중간에 낀 관리자들은 아마 미쳐갔을 것이다. 물론, 야근에 미친 실무진이 먼저 화를 내며 임원 A에게 공개적으로 화를 냈다. 나름 쿨한 IT 회사였고, 일단은 평등 문화를 지향했으니, 모든 직원과 임원이 볼 수 있는 채널이 있었다. 그곳에서 공개적으로 화를 낸 직원들의 글을 본 임원 A는 더 크게 화를 냈다. 어디까지나 나의 추측이지만, 임원 A는 모든 직원들에게 평등하게 대해주고, 쿨하게 농담을 던지며, 함께 식사도 하는 자신이 마치 소통에 문외한인 것처럼 보이는 글을 받아들일 수 없는 모양이었다. 임원 A는 결국 실무진의 불만에 이해할 수 없는 답변을 남기고, 자기가 지시한 일을 강행했다.
그러자 중간 관리자들이 먼저 줄퇴사했다. 아마 임원 A를 직접 마주하며 겪은 스트레스에 더해, 신사업은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걸 느꼈을 것이다. 그걸 본 직원들도 줄퇴사했다. 신사업은 정말로 크게 실패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임원 A는 은퇴했다. 업계를 영영 떠났다. 미쳐 돌아가는 야근을 감당하며, 어떻게든 제품을 살려보려 했던 나는 결국 병이 났고, 꽤 오랜 시간 휴직해야 했다. 그러니까 나는 이직을 못 하고 회사에 남아 버린 것이다.
회사에 남은 나는 퇴사한 직원들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 부서를 이동한 개발자 B를 만나게 됐다. 임원 A 만큼은 아니라도, B 역시 이 회사에서 굉장히 오래 일한 개발자였는데, 나는 B에게서 의외의 말을 들었다. 그는 오래전, 임원 A와 함께 일했던 시절을 이야기하며, 임원 A를 굉장히 좋게 평가했다. 그리고 A가 은퇴해서 무척 아쉽다고 말했다. 인간이란 다면적이고 알 수 없는 존재라고는 하지만, 대체 임원 A는 어떤 사람이었던 걸까?
모든 사람이 그런 건 아니지만, 나는 평등 문화를 추구하는 IT 업계가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느낀다. 물론, 전통적인 대기업과 달리 직급 없는 문화를 가지고 일의 본질에만 집중하는 건, 자부심 가질 만큼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런 자기 모습에 심취하는 순간, 그 대단한 수평 문화는 깨져버린다. 그토록 대단하고 자부심 넘치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의견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수평 문화의 진정한 의미는 사라진다. 애초에 수평 문화를 추구한 건, 직급에 상관없이 다양한 의견을 나누기 위해서일 테니까.
"나는 수평 문화를 지향할 만큼 열려 있는, 멋지고 능력 있는 성공한 개발자"라고 자만에 빠져버린 순간, 꼰대를 넘어서 자기모순에 빠진 볼썽사나운 인간이 되어 버린다. 차라리 쿨한 척이라도 하지 말지, 왜 모든 걸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남을 지옥 속에 밀어 넣는가. 수평 문화 외에도 "일에 본질에만 집중하면 됩니다", "모든 걸 솔직하게 소통해요", "중요한 건 재미죠" 등 이 업계에는 각종 쿨한 캐치프레이즈가 넘쳐난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말을 외치는 자기 자신에게 심취한 사람들이 있다. 그 쿨하고 멋진 구호를 외친 사람의 주변 사람들이 문제가 있다고 말하면 "문제가 있는 네가 쿨하지 못한 것이며, 네가 야근을 하는 건 네가 능력이 없어서"라며 오히려 비난 어린 말을 퍼붓는다. 아무리 성과주의라고는 해도 이런 기만적이고 기형적인 성과주의는 대체 무엇일까.
개발자를 그만둔 지금 돌이켜 보면, 참 이 업계는 남에게 멋져 보이고 싶은 욕구가 뚜렷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든 천재 개발자가 되고 싶어서 애를 쓰는 주니어 개발자들은 차라리 귀엽다. 하지만 자신이 모두에게 열려 있는 멋지고 쿨한 개발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위험하다. 각종 비난에 취약할뿐더러, 멋지고 쿨한 자신의 결정이 옳다고 판단하고 남을 착취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게다가 쿨한 이미지는 스스로에게도 해가 된다. 나 역시 쿨한 척하려 애를 썼고, 그렇게 보이기 위해 자기 계발에 목을 매었다. 하지만 결국 그 쿨한 이미지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에 우울증과 가면증후군을 겪기도 했다. 나뿐만 아니라 실력이 출중한 개발자들도 자신이 멋지고 쿨한 개발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종종 우울증을 겪는다.
지금 생각해 보건대, 정말 훌륭했던 개발자들은 그런 이미지를 추구하지 않았다. 그분들은 인간적으로도 훌륭한 분이셨다. 개발자라는 직업을 갖지 않으셨어도, 그분들은 분명 좋은 분이셨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스스로를 굳이 드러내지 않고, 그저 묵묵히 일을 하고, 겸손하게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물어볼 줄 아는 분들이 있었다. 무슨 강연을 하기는커녕, 자기 의견을 함부로 드러내는 일도 없었다. 그게 다른 사람에게 강요가 될 수 있기도 하고, 굳이 그런 욕구를 못 느끼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관리자가 되었든 개발자가 되었든 훌륭한 분들은 다른 사람을 인간적으로 대할 줄 알고, 겸손하지만 비굴하지 않았다. 하지만 업계는 늘 자신을 멋지고 쿨한 사람으로 포장하고, 이리저리 자신의 멋진 모습을 광고하는 사람들이 넘쳤다.
개발자를 그만두기로 한 것은 그 쿨한 이미지가 불쾌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끔찍하게 느꼈던, 각종 쿨한 캐치프레이즈들이 싫었다. 이미지에 불과한 쿨한 느낌에 집착하는 사람들과 그 이미지 때문에 흑화 되기도 하고, 고통받기도 하는 사람들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그 쿨한 이미지에 현혹되었던 사람이었고, 앞으로도 그 멋진 이미지에 현혹될 수 있다는 사실이 싫었다.
그 기만적인 환경 속에서 인간성이 깎여 나가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남을 현혹하고, 자기를 쿨하다고 속이고, 그 쿨한 이미지 때문에 질투하고, 완고해지고, 고집스러워지는 이 모든 광경이 끔찍했다. 새로운 기술을 쓰는 걸 보여주면서, 자신이 이렇게 신세대이고, 유연하고, 멋지다고 외치는 사람들 속에 있으면 있을수록, 인간성이 무엇인지 자꾸만 생각하게 되었다. 개발자는 늘 새롭고 멋진 존재라는 정답은 정해져 있고, 정답을 벗어나는 너는 개발자스럽지 않다고 강요하는 것 같은 그 이미지가 오히려 기만적이며 불쾌하게 느껴졌다.
인간처럼 생겼지만, 인간이 아닌 무언가에게 느끼는 혐오감. 그게 내가 느낀 불쾌함이었다. 멋진 이미지를 보여주고자 하지만, 이상적인 이미지에 매몰되어서 인간성을 잃어가는 그 현상이 정말 끔찍했다. 차라리 구로의 등대, 판교의 불기둥처럼 대놓고 이 업계는 별로라고 이야기하는 편이 나았다. 왜 모든 게 개방되어 있는 척, 새롭고 멋진 척하면서 사람들을 현혹한단 말인가. 멋진 가면 뒤에는 가면을 벗기려는 자들을 용서 못 하는 추악한 본모습이 있을 뿐인데.
임원 A의 여파로 몇 달이나 휴직을 해야 했던 나는 그때 즈음에 완전히 지쳐있었다. 먹고살기 위해 계속 개발을 해야 했지만, 나는 점차 회의감이 짙어졌다. 이직을 하면 좀 나아질까 싶기도 했지만, 어차피 이 업계에 있는 이상 똑같은 문제는 계속 반복될 것이 뻔했다. 이전에도 썼지만, 회사에 다니는 이상 나라는 개발자는 더 이상 창작자가 아니었으며, 한도 끝도 없이 자기 계발을 해야 했고, 기만적인 업계 사람들을 계속 마주해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이 업계에서 일을 한다는 것 자체에 넌더리가 났다.
임원 A 때문에 많은 동료들이 떠나가고, 회사에 남은 나는 그렇게 회의감과 깊은 슬픔을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흔한 재앙일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임원의 잘못된 결정에 사람 떠나가는 일은 비일비재하니까. 하지만 나에게는 그냥 그런 일로 남지 않았다. 그동안 어렴풋이 느꼈던 회의감에 결정타가 더해지자, 더 이상 나에게 개발은 멋진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화려한 가면을 쓰고 사람들을 비웃으며 사기 치는 역겨운 존재처럼 느껴졌다. 지나치게 감상적인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화려한 가면 뒤의 끔찍한 무언가를 더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개발에서 마음이 떠나버렸고, 점차 코딩을 하는 것조차 힘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