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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김 Apr 07. 2024

나의 개발자 동료들에게

안녕, 행복하길 바라요

이제는 정말 10년 전.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나서, 10년 전이라고 부르기가 낯설다. 입사 후 처음 팀을 배정받았던 날이 아직도 생생한데, 벌써 10년이 지났다니. 좋은 선배들을 만났다. 회사에서 멘토도 연결해 주었는데, 정말 좋은 분을 멘토로 만나 회사 내의 훌륭한 분들을 두루두루 뵐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내게 이런 개발자가 되라며, 롤모델로 삼을 만한 분을 소개해주시기도 했다. 선배들도 모두 친절했고, 내게 격려도 많이 해주셨다. 정말 행운이 가득한 시기였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때의 행운과 기대를 모두 실망시킨 것 같다. 훌륭한 개발자가 되지도, 하다못해 그저 그런 직장인도 되지 못했으니까.


함께 입사했던 동기들은 모두 잘 지내고 있을까. 연락은 오래전에 끊겨서 잘 모르겠다. 친하게 지내던 동기들도 있었는데, 이제 다들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아마 내 기억 속의 20대와는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을 것 같다. 그렇다 해도 내게는 10년 전 모습으로 남아있겠지.


요즘처럼 꽃이 피면 함께 산책을 했던 동료들도 있었다. 대왕판교로 옆의 시냇가를 따라 이어지는 공원까지 커다란 벚나무들이 많았다. 봄이 오면, 모니터만 보느라 지친 눈을 쉬게 할 겸 벚꽃을 보러 나갔다. 다시 생각해도 판교는 벚나무들이 커서 꽃이 핀 가지들이 무척 풍성했고 아름다웠다. 올해도 판교에는 흐드러지게 벚꽃이 피었을 것이다. 이제 보러 갈 일이 없을 뿐.


개발을 그만두고, 회사도 떠났지만 지난날을 떠올리면 불행한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동료들과 함께 일했던 날들은 가끔 빛이 났고, 나에게는 그게 소중한 기억으로 남았다. 이제 업계를 나왔으니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없지만, 앞으로도 개발자로서 회사원으로서 살아갈 그들의 행복을 빌어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모쪼록 나와 스쳤던 모든 인연이 다 잘 되길 바라서, 그리고 나와 같은 불행을 겪지 않길 바라서 몇 마디 적어본다.



나의 성장을 도와준 선배님들께

신세를 진 분들이 너무 많아서, 도움 받은 것들이 너무 많아서 어떤 말로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천방지축이었던 나를 꽤 괜찮은 직장인으로, 제 몫은 해내는 개발자로 만들어주신 분들이 너무 많다. 정말 열정만 넘쳐서 이리저리 부딪히던 나를 좋게 봐주시고 도와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드리고 싶다. 주니어 시절, 제 몫을 못해서 힘겨워하던 나를 위해 함께 야근해 주신 선배님도 계셨고, 개발에 관한 지식을 열심히 전달해 주시던 분도 계셨다. 모두 내게 주어진 엄청난 행운이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모두 떠나시기도 했고 내가 떠나기도 하며 헤어졌지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정말 감사했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나는 과분하게도 너무 많은 것을 받았다. 내가 선배가 되어버린 어느 순간에 그걸 더 절절하게 느꼈다. 나를 대신해 책임을 지고, 또 나에게 많은 경험과 지식을 전달해 주신 그분들이 얼마나 많이 후배를 배려했고, 진심으로 성장을 돕고 싶어 했는지는 나중에야 알았다. 물론, 그게 선임의 당연한 책임이고, 그 모든 노력이 연봉에 포함되어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안다. 게다가 나는 업무 외에도 좋은 인맥을 소개받기도 했고, 함께 개발 공부도 했으니, 분명 선배님들이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것보다 넘치는 걸 받은 게 틀림없다.


시장이 어려운 와중에도 개발자들이 높은 실력을 보유하고 있고, 사람들이 좋은 품질의 IT 서비스를 누릴 수 있는 건 분명 이 분들의 열정과 노력 덕분이다. 진심으로 개발을 좋아하고, 더 좋은 개발자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며, 다른 개발자와 함께 가기 위해 선의를 베푸는 그분들이 있기에 IT 업계가 굴러가고 있다. 나 역시 그분들 같은 개발자가 되고 싶었고, 업계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으나 결국 그러지 못한 게 무척 아쉽다. 선배님들이 내게 베풀어준 호의를 다른 후배님들께 전해주지 못한 채 개발을 그만둔 건 내게 마음의 부채로 남아있다.


그러니 감사한 마음과 죄송한 마음을 동시에 전하고 싶다. 함께 했던 모든 날들이 나를 개발자로서 살게 했고, 인생의 좋은 순간들을 많이 선사해 주었으며, 개발을 하며 보낸 10년이 헛되지만은 않게 해 주셨다. 모자라고 손이 많이 가는 후배였을 텐데, 많은 인내와 선의로 이끌어 주셨던 게 마음에 남는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아랫사람을 챙기는 게 정말 쉽지 않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나를 챙겨주시고, 팍팍한 직장 생활에도 인간성을 느끼게 해 주셨던 모든 노고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업계를 이끌어갈 후배님들께

나는 꽤 오래 막내 생활을 했다. 신입을 더 뽑지 않는 팀에 있었고, 연차가 어느 정도 올라간 후에도 나보다 적은 연차를 가진 분들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사실 나와 마주한 후배님들이 그리 많지는 않다. 아무래도 후배님과 함께한 경험이 적다 보니, 그분들을 케어하는 게 많이 부족했을 것이다. 나름대로 열심히 해보려고는 했으나, 내가 선배님들에게 받은 것의 반도 주지 못한 것 같다. 혹시라도 나를 스쳐갔던 후배님들에게는 늘 죄송한 마음뿐이고, 부디 업계의 좋은 분들을 만나 훌륭한 개발자로 성장하시길 바란다.


나는 개발 실력이 뛰어난 선배는 아니었다. 심지어 연차가 어느 정도 올라갔을 때는 이미 개발에 심한 회의감을 느끼고 있어서, 신기술을 적극적으로 공부하지도 않았다. 나보다 새로운 기술에 익숙한 후배님들이 많았고, 그분들은 모두 능력이 뛰어났다. 매년 새로 들어오는 분들은 점점 더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회사에 들어왔다. 그나마 회사가 좋은 분들을 뽑는 능력은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모자란 내가 그분들에게 줄 수 있는 것들은 많지 않았다.


내가 후배님들께 해드릴 수 있는 건, 스펙을 조율하고 일정을 쪼개어 업무를 진행하는 걸 눈에 보이게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개발자로서 괴로운 순간들이 찾아왔을 때, 그럴 수 있다고 안정감을 주는 것이었고, 개발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을 조직과 사람들을 조율해서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었다. 뭐, 연차 있으면 당연히 해야 할 일 같아서 딱히 자랑은 아닌 것 같다. 내 선배님들처럼 좋은 인맥을 소개해주거나, 개발에 영감을 주기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불행히도 내게는 그런 능력이 없었다. 거기에 의욕마저 없는 개발자였으니 나는 좋은 선배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나를 잘 따라주고, 고맙다며 선물까지 받았을 때는 내가 훨씬 더 고맙고 미안했다. 내가 이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아서. 내가 더 챙겨주지 못해서.


이미 잘하고 계시고, 업계를 훌륭히 이어받고 있는 후배님들께 내가 무슨 말을 얹을 수 있을까. 그저 나처럼 지나치게 열정을 보이다 개발을 그만두지 않기를 바라고, 잘하고 있으면서 자신이 부족하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하지 않기를 바란다. 선배들이 보기에는 스스로가 바보 같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늘 감탄하고 있다. 내가 그 연차일 때보다 너무 잘해서. 너무 열심히 해서. 개발하면서 겪는 어려움은 선배들도 겪는 어려움이고, 대부분의 문제는 선배들이 해결할 수 있으니, 무슨 일이 닥쳐도 너무 겁먹지 않기를 바란다.


밝고 선한 후배님들을 만나 나 역시 많은 기운을 받았다. 마주치면 늘 좋은 기분으로 미소 지을 수 있었고, 내가 부족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인생의 더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사실 내가 개발자가 되었을 때보다 어려운 시절에 후배님들이 개발을 시작하게 되어 안타까운 마음도 있다. 부디 업계에도 선순환이 생겨서, 열정적이고 꿈 많은 개발자들이 실망해서 떠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나는 회의감을 떨치지 못하고 떠나지만, 앞으로 업계에 남을 후배님들은 즐거운 일만 겪기를 바란다. 더 도움이 되는 말을 해주고 싶지만, 그저 그런 개발자였던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고작 이런 것 밖에 없어 안타깝다.



바라건대

업계에 남아 있을 모든 인연들이 행복하기를 바란다. 나의 몇 마디 말로 업계가 바뀌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그분들을 위해 적어본다. 먼저, 말도 안 되는 일정을 강요받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어떤 사람은 시장 상황이나 경영 실적 등 다양한 이유로 일정을 밀어붙이고, 안 되면 되게 만들라는 식으로 말하는 게 혁신적이고 강한 리더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가장 구시대적이고 가장 비효율적인 리더다. 위대한 리더가 이런 방식으로 성공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피해야 한다. 물리적으로 안 되는 걸 되게 만들 수는 없다. 안 되는 건 진작에 피하거나 방책을 마련하는 게 논리적으로 맞지 않은가. 그리고 그 일정 맞추느라 여러 사람이 실려가고 극단적 선택을 한다면, 무슨 실적을 어떻게 내야 그 리더가 위대한 리더가 될 수 있겠는가. 특히 개발자는 아프거나 극단적 선택을 해도 회사는 그다지 책임지지 않는다. 그저 개인의 일로 치부하거나,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모호하다는 이유로 회피하는 게 전부다. 그러니 애초에 무리한 업무나 일정을 강요하지 않았으면 한다. 가능하면 법률로 제재하는 게 가장 좋을 것 같다.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개발자가 스스로의 실력을 비관하지 않았으면 한다. 개발자들은 어떤 문제든 척척 해결하는 능력 있는 개발자의 모습을 동경한다. 실제로 실력에 따라 다른 대우를 받는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실력으로만 인정받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학벌이나 출신 등으로 차별받지 않고, 실력만 보는 건 다른 업계에도 자랑할만한 IT 업계의 장점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실력이라는 게 정확히 점수로 나오는 게 아니다. 코딩테스트처럼 숫자로 결과가 나오면 모를까, 개발자에게 필요한 능력은 무척 다양해서 점수화가 불가능하다. 모두 짐작만 하고 있을 뿐, 실력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자기 실력을 폄하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게다가 공유를 빙자한 자랑이 빈번한 분위기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위축이 되고, 남들은 열심히 사는데 나는 왜 이것밖에 못하나 하는 자괴감이 든다. 실력 있고 인정받는 사람일수록 가면 증후군도 심하다. 자기는 보잘것없는 사람인데, 남을 속이고 있다고 믿는 일이 빈번하다. 이전 화에서도 말했지만, 대부분은 자기 업무를 잘 처리하고, 남을 도울 수 있을 만큼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자기가 아무리 A급 인재라도, A급만 모아놓은 회사에서는 B, C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왜 회사가 아닌 개인이 자신을 탓하며 괴로워해야 하는가? 실력에 대한 압박을 심하게 받은 나머지, 우울증을 앓는 개발자가 생각보다 많다. 자기 계발에 너무 매달려서 건강도 잃고 삶을 유지하지도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개발을 오래 하고, 진정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면 스스로의 실력을 지나치게 폄하하지 않길 바란다.



모두 행복하기를

내가 꿈꾸던 이별은 모두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고맙다고 말하는 것이었는데, 실제로 내가 퇴사할 때는 희망퇴직을 받을 때라서 이미 동료들이 거의 다 사라진 다음이었다. 텅 비다시피 한 사무실에서 조용히 짐을 정리하고 회사를 빠져나오는 게 전부였다. 그렇게 회사를 떠나는 내가 안타까웠는지, 조금 높은 조직장님이 직접 나와 나를 배웅해 주셨다.


10년 가까운 세월은 그렇게 많은 인연으로 채워져 있었건만, 떠나는 길은 외로웠다. 이제 다시 보지 못할 얼굴들이니, 꼭 행복하라고 해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늦게나마 지면을 빌려 인사를 적어본다. 코딩에 열정을 쏟는 모든 분들이 오랫동안 즐겁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지내기를 바란다. 나와 같은 회의감을 느끼지 말고, 그저 좋은 일만 많이 생겨서 행복하게 회사를 다니고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갖기를 바란다. 한때의 내가 그러했듯이 해커톤도 하고, 동료들과 열띤 토론도 하고, 좌절과 성취를 느껴가면서 무언가를 만들어내길 바란다.


이제 내가 개발에 대해 할 말은 끝났다.

이미 그만둔 지 꽤 오래된 마당에 말이 참 많았다. 다음 화부터는 개발자 이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한때의 열정을 접어둔 나는 새로운 삶을 마주했다. 이제 텅 빈 캔버스 같은 이 남은 삶을 어떻게 채워나가야 할지 고민이 필요했다. 적어도 개발을 했을 때만큼 괴롭고 싶지는 않았다. 또 다른 고통을 겪을지언정, 같은 일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이제 무엇으로 살아야 할지, 어떤 사람으로 살아야 할지 그걸 알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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