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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김 Apr 14. 2024

이제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 제목이다. 처음 읽은 게 언제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중학생인가, 고등학생 때 처음 읽은 것 같은데,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아도 책을 읽고 참 마음이 따뜻해졌던 감상이 남아있다. 단편 소설이라고는 해도, 마치 어른을 위한 동화처럼 가벼운 이야기이다. 소설의 끝에서 톨스토이는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는 메시지를 남긴다. 그 외에도 다른 깨달음들이 있는데, 그건 앞으로 소설을 읽으실 분들을 위해 적지 않겠다.


사람이 사랑만으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랑만 있으면, 집도 생기고 밥도 생기면 참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그런 교훈만으로 살아가기에는 나는 세상의 풍파를 조금 맞은 나이였다.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리다고도 말할 수 없는 30대 중반이었다. 집값의 무서움을 온몸으로 느끼며, 내 한 몸을 스스로 건사해야 하는 어른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이전 화에서 이야기한 대로, 나는 더 이상 개발자로 일할 기운이 남아있지 않았다. 열정이라고는 모두 소진해서, 이직을 할 기운도 남지 않았다. 결국 이직처를 구하지 않은 채, 나는 희망퇴직 절차를 밟았다. 퇴사를 앞두고 서서히 업무를 손에서 놓으며 조금씩 개발이 내 삶에서 비켜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이제 더 이상 코딩을 하지는 않겠구나. 나는 이제 이 업계를 떠나는구나. 하루하루 그걸 체감했다. 오랫동안 잘하고자 부단히도 노력했던 일을 그만두는 건데도,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너무도 분명하게, 개발은 이미 내 마음을 떠난 지 오래였다.



이제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개발 그 자체를 위해 살았던 나는 개발 외에 다른 것은 남지 않은 빈껍데기였다. 정신과 선생님이 내게 해주신 말 중 하나도 이것이었다. 내 삶이 일은 아니라고. 일이 내 삶을 정의하지는 않는다고. 그 말대로 나는 내 삶의 많은 부분을 개발에 갖다 바쳤다. 내 삶은 개발자로서의 나를 위해 맞춰져 있었고, 개발 외의 내 삶은 별로 남아있는 게 없었다. 정신과 상담을 받으며, 나는 개발자가 아닌 나의 삶을 찾아보려 했다. 그렇게 찾아낸 것이 글쓰기였다.


어쩌면 창의적 활동이라는 점에서, 글쓰기와 코딩은 맞닿아 있는지도 모르겠다(물론, 지금 말하는 코딩은 회사 업무로서의 코딩이 아니라, 순수하게 내가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드는 코딩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글쓰기는 코딩보다 나 자신을 더 섬세하게 드러낼 수 있었고, 컴파일이나 데이터 전달 같은 현실적인 문제에 신경 쓸 필요 없이 마음껏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게 달랐다. 무엇보다도 어린 시절부터 내가 조금씩 해왔던 일이었다.


퇴사 전, 개발을 마음에서 놓아버릴 때부터 나는 글을 썼다. 글쓰기에 사활을 걸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개발에 지친 마음을 털어놓고 싶었고, 개발로 하지 못했던 창의적 활동을 해보고 싶은 것뿐이었다.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쓰는 날도 있었고, 짧은 소설을 습작하기도 했으며, 다양한 책을 읽어보고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는지 궁리를 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개발을 놓기로 결심할 즈음에는 완전히 글쓰기에 빠져 있었다.


개발자가 아닌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사실 완벽하게 들어맞는 답은 아니었지만, 나는 글쓰기가 하고 싶었다. 남은 인생은 글쓰기로 살겠습니다, 같은 거창한 목표는 세울 수 없어도 글을 쓰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퇴직금도 있고 희망퇴직 위로금도 받았으니, 좀 쉬어도 괜찮았다. IT 업계 말고는 할 만한 일자리도 없는 마당에, 이왕 이렇게 된 거 한 번 사는 인생, 하고 싶은 거 하자는 생각으로 글을 썼다. 다시 안정적인 수입이 생길 때까지 방황은 계속될 거고, 아마 글쓰기는 방황 중 잠시 쉬어가는 정거장에 불과하겠지만, 지금의 나는 글쓰기로 살아가고 있다.



잃어버렸던 창작욕을 되찾으며

이렇게 글을 쓰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생각하다 보니, 나는 내가 꽤 창의적인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조용히 공부나 하고 적당히 월급을 받는 게 천성인 줄 알았는데, 사실 그게 적성에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학창 시절의 나는 가끔 소설을 쓰는 걸 좋아했고, 포토샵으로 이미지를 만들거나, 새로운 선물 포장 방법 같은 걸 생각하기도 했는데, 적당히 공부 잘하고 모범생처럼 살다 보니 회사 생활도 잘할 거라 생각했나 보다. 정작 홈페이지나 앱처럼 새로운 서비스를 만드는 개발이 너무 멋져 보여서 개발자를 선택했으면서.


돌이켜보면 내가 가장 재미있게 했던 개발 업무는 기획이 따로 필요 없는 백오피스 기능을 만들었을 때였다. 고객이 사용하는 서비스가 아니니, 정말 만들고 싶은 기능을 마음대로 붙였는데 그때 동료들의 반응도 가장 좋았고 나도 재미있었다. 이래저래 나는 회사의 입맛에 맞는 서비스를 개발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쓰는 게 재미가 있었다. 퇴사 후에는 여행이라도 갈 법한데, 어디 나가는 일도 없이 나는 집에서 계속 글쓰기를 이어갔다. 기왕이면 잘하고 싶었고, 돈도 벌고 싶어서 남아도는 시간을 모두 투자해 글을 썼다. 물론, 창작이 마냥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무리 흥미가 있어도 잘하겠다고 마음먹고, 거기에 돈까지 벌겠다면 상당한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그나마 나는 작가들의 에세이나 창작에 관한 책과 영상을 자주 보았던지라 창작의 고통이 무척 심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실제로 본격적으로 글을 쓰는 건 무척 힘들었지만, 나는 나의 이야기를 끝까지 쓰고 싶었고, 소소한 목표라도 꼭 이루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진짜 힘이 들 때면, 회사 생활을 떠올리며 '개발에 비하면 할 만 해'하고 다시 일어섰다. 회사 생활에 실패한 경험이라도 이럴 때는 꽤 도움이 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창작에 소질이 있냐고 묻는다면, 이미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 많다고 할 수밖에 없다. 뒤늦은 나이에 창작에 뛰어든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걸로 먹고살 수 있을지 확신할 수도 없다. 괜찮은 작품을 내놓지 못한 채 돈이 떨어지면, 다시 회사를 다녀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나는 지금 꽤 행복하다는 것이다. 인생의 모든 시기를 통틀어 손에 꼽을 정도로 평화롭고 행복하다. 새로운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 즐겁고, 이 일을 가능한 한 오래 지속하고 싶다. 어떻게 창작을 하지 않고 그 오랜 시간을 살아왔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작은 성과도 있었다. 한 공모전에 출품한 단편 소설이 본선에 올라갔다.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예선 통과도 쉽지 않은 공모전이라 나는 무척 기뻤다. 재능이 없는 것 같지는 않아서, 앞으로 계속 글을 쓰면 무언가 성과를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돈이 좀 될까 싶은 마음에 웹소설도 썼다. 생소한 분야라서 많이 힘들었지만, 퇴사 3개월 후에는 출판사와 계약을 했고, 곧 웹소설 3대 플랫폼 중 하나에 런칭을 하게 되었다. 장편 연재라 매번 마감에 시달리고 있어도, 그래도 내가 쓴 이야기가 머지않아 독자들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떨리는 마음으로 계속 쓰고 있다.


인생은 먼 길을 돌아 제자리를 찾기도 한다는 말을 지금은 믿는다. 가끔 작은 글을 끄적이던 내가 10년 가까운 회사 생활을 접고 나서, 다시 글을 쓰게 될 줄은 누가 알았을까. 개발에 평생을 바칠 줄 알았던 내가 사실 더 좋아하는 일을 찾게 될 줄은 누가 알았을까. 나는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그 답은 살아가면서 계속 변해가는 모양이다. 지금은 글을 쓰며 살아가지만, 먼 훗날에는 또 다른 무언가를 하면서 살아갈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시 회사를 다닐 수도 있지만, 반대로 더 멋진 일을 하면서 살아갈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그저 나도 있는 줄 몰랐던 창작욕을 불태우며, 즐겁게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다음 화에서는 IT 업계 밖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엄청난 생산성과 찬란한 신기술로 가득했던 IT 업계를 나오니, 세상은 꽤 느리게 변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 빠르게 변하는 IT 업계 속에 있던 나는 생각보다 천천히 변하는 세상을 보고 조금 놀랐다. 조금 느리게 걸어도 괜찮았고, 엄청난 생산성에 집착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것 또한 세상에는 필요한 일이고,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다. 개발자를 그만두고 나서야, 나는 천천히 숨 쉬는 방법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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