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 사람 최승선 017] 아침 7시, 말이 산책하는 시간이었다.
미라클모닝 신드롬이 대한민국을 휩쓸기 10년 전쯤, 나는 1년에 2, 3회쯤 미라클모닝 충동에 휩싸였다. 가장 흔한 날은 시험기간이었다. 왜 공부를 안 하냐며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1시간쯤 수다를 떤 후에야 '이젠 진짜 해야 해.' 하며 끊던 나는 시험기간이면 그렇게 첫 차를 타자고 친구를 꼬셨다. 혼자라면 절대 타지 않을 테니까, 서로 모닝콜을 해주고 버스 타러 가는 길에 연락을 하고, 그리고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자고.
그렇게 약속을 한 날의 대부분의 날은 의외로 성공이었다. 가뜩이나 상쾌한 양평의, 더욱 쾌청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6시 30분 차를 타는 일은 중학생의 성취감을 크게 자극했다. 그러나 목적은 언제나 실패였다. 대체로 우리는 평소보다 1시간 빨리 학교에 가서, 베이스볼 게임을 했다. 공부하기 전 뇌에 자극을 주겠다는 목적이었으나 친구들이 모두 등교할 때까지 우리는 '한 판만 더 할까?' 하며 낄낄대길 멈출 수 없었다.
미라클모닝의 맛을 들인 중학생은 사춘기를 맞이한 것인지 고독의 시간이 필요했다. 100여 곡의 노래가 들어가는 mp3에 이어폰을 꽂고, 새벽에 학교까지 걸어갔다. 차로 10분 거리의 학교는 차가 드문 길로 돌아갈 때 약 1시간 30분 정도의 도보 거리였다. 학교에 도착해서 왜 버스에 안 탔냐는 물음에 별 일 아니라는 듯 '걸어왔어'라고 답할 때의 감정은 어떤 것이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런 고독의 아침 중 하루였다. 이제 30분만 더 걸어가면 학교에 도착할 때였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니, 이어폰만 꽂고 앞을 보며 뚜벅뚜벅 걷던 중 시야 끝에 말이 보였다. 고동색의 진짜 말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수학여행으로 제주도에 가서 봤던 말이었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돈 모아서 말을 살 거야!'라고 다짐했지만, 천만 원이라는 말에 평생 못 사겠구나 체념했던 바로 그 말이었다!
내가 걷던 그 길은 초원이 아니었다. 아스팔트 포장도 되지 않은 시멘트 포장이 된 차 두대가 겨우 지나갈 폭의, 그러나 차 한 대도 잘 보이지 않는 그런 도로였다. 그런 길에, 양평에서도 자연 같지 않은 바로 그 길에 말이라니. 심지어 그 말의 주인아저씨는 말을 타고 있지 않았다는 게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말과 서로 보폭을 맞추고 같이 걷고 있었다. 말을 산책시켜준다고? 이 동네에서???
중학생의 걸음도 느렸고, 말도 여유로웠다. 어른을 본 청소년은 인사를 해야 하는 충분한 시간이었고, 인사를 받은 어른은 뭐라도 말을 골라 건네야 하는 너무 긴 시간이었다. 아저씨는 그 동네에서 말을 키우고, 이 시간에 말을 산책시켜 준다고 했다. 차가 없는 시간에 맞춰. 아직 넉살을 개발시키지 못한 청소년은 '아,,,' 외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고, 할 수 있는 대로 미소를 지은 후 인사를 하고 가던 길을 갔다. 몇 번을 돌아봤지만.
1년에 한 번씩 그 길을 운전해서 가게 된다. 그때마다 말의 안부를 생각한다. 나를 만난 이후 얼마나 그 길을 걸었을지, 어떻게 살았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