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메모리히아신스색
민감한 코에서 향기가 들립니다.
어릴 적, 우리 집 마당 한편엔 향기 나는 꽃이 피었습니다.
비탈진 담벼락 밑, 그늘진 흙 사이를 뚫고 올라오던 작은 꽃.
하얗고 보랏빛이 감도는 그 꽃의 이름도 몰랐지만,
아침에 문을 열면 코끝에 먼저 와닿던 그 향기만은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 향기를 맡으면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분에 킁킁거리며 향기를 쫓아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았지요.
그 향기의 추억은 신혼집에 친정엄마가 선물 해 주신 예쁜 꽃에서 돋아납니다.
초록 줄기 위에 동글동글 피어나던 꽃봉오리.
"이건 히아신스야. 봄이 오기 전에 먼저 향기가 좋을 거야."
그 말이 너무 예뻐서 매일같이 물을 갈고 햇빛을 쬐어줬습니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줄기가 기울고, 꽃이 피기 전 시들고 말았습니다.
엄마의 마음까지 시들게 할까 봐 괜히 미안했던 그 봄날.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꽃도 마음처럼 조심히 다뤄야 한다는 것을요.
봄이면 꽃이 핍니다.
하지만 정말 먼저 피는 것은 꽃잎일까요, 아니면 우리의 감각일까요?
거리를 걷다 보면, 시선보다 먼저 코끝을 간질이는 향기가 있습니다.
눈을 돌리기 전, 이미 마음이 돌아봅니다.
그 꽃이 바로, 히아신스입니다.
대부분의 봄꽃들은 잎보다 꽃이 먼저 핍니다.
이는 식물의 생존 전략입니다.
겨울을 견디며 에너지를 저장한 식물은 잎보다 꽃을 먼저 피워 번식에 집중합니다.
잎을 내기 전, 곧바로 벌과 곤충을 유인할 수 있는 색과 향으로 봄을 알리는 것이죠.
히아신스 또한 이 전략을 따릅니다.
꽃이 피고, 향이 번지고, 그제야 잎이 따라 나옵니다.
이는 마치,
우리도 누군가를 처음 만나기 전에
마음을 먼저 열어두는 것과 닮아 있는 듯합니다.
히아신스(Hyacinth)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태양신 아폴론이 사랑하던 청년 히아킨토스(Hyacinthus)가 사고로 죽자,
그의 피에서 아름다운 꽃이 피어났다고 전해집니다.
아폴론은 슬픔 속에서 그 꽃을 '히아신스'라 부르며 그의 이름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히아신스는 단순히 향기로운 봄꽃을 넘어서,
잃어버린 것에 대한 기억, 그리고 영원한 사랑을 상징하는 꽃이 되었습니다.
히아신스의 향기는
리날룰, 테르피네올, 벤질 아세테이트 등 다양한 에센셜 오일 화합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향들은 공기 중으로 퍼지며 후각 수용체를 자극하고, 감정과 기억을 저장하는 뇌의 편도체를 흔듭니다.
그래서 히아신스의 향은 “봄의 냄새”이자,
“그때 그 사람”, “그 시절의 하루”를 다시 떠올리게 만드는 색이 없는 기억의 색이 됩니다.
향기가 나는 건, 꽃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인사이기도 합니다.
말하지 않아도, 향기로 다가오네요.
다채로운 색을 품고 있지만
그보다 먼저 향기로 공간을 점령합니다.
작은 꽃송이들이 뭉쳐 진한 향기를 퍼뜨리며,
이름도 없이 지나가는 봄날을 부드럽게 끌어당기지요.
아이들은 종종 묻습니다.
"향기는 눈으로 볼 수 없는데, 어떻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 질문은 곧, 향기가 보이지 않는 색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꽃은 시각으로만 피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후각으로 먼저 봄을 기억합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후각은 살아있습니다.
이 세상에도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니지요.
특히, 히아신스는 향기로 색을 말하는 꽃입니다.
그 보랏빛 향기,
그 희미한 분홍 냄새.
그건 보이지 않아도 우리 안에 들어와 마음을 물들이고 머물다 갑니다.
봄의 색은 실제로는 매우 빠르게 지나가지만, 히아신스의 향기는 오래 남습니다.
마치 우리가 누군가를 그리워할 때 모습보다 냄새가 먼저 떠오르는 것처럼요.
천리향, 만리향의 기억도 있지만 오늘은 기억속의 히아시스가 떠오르네요.
봄꽃들은 잎보다 먼저 핍니다.
히아신스는 색보다 향기로 먼저 찾아옵니다.
그건 봄이 우리에게 눈보다 마음으로 먼저 다가오기 때문이 아닐까요.
히아신스 한 송이의 향기 속에는
햇살, 기억, 설렘, 기다림이 녹아 있습니다.
우리가 지나치며 놓친 봄이 있다면, 그건 눈으로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향으로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이겠지요.
마음껏 향기로 시작된 계절을 즐기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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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및 참고자료*
https://blog.naver.com/ha601201/222640787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