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손에 있다 들어온 책에는 어떤 식으로든 사람의 흔적이 묻어 있다. 책을 읽다 접어 놓은 흔적이라던가, 감동적인 구절이나 중요한 정보에 밑줄이 그어져 있다던가. 운이 좋으면 밑줄 친 내용 옆에 짧은 감상이 적혀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런 책을 만날 때면 혼자만의 독서 시간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이름 모를 전 주인과 함께 하는 시간이 된다.
여기 95년도 이상 문학상 당선작 작품집이 있다.
나는 이 책에 실린 한 작품 때문에 이 책을 찾아다녔다. 오래된 작품이기에 구하는 게 쉽지 않았으나, 기적처럼 한 중고 서점에서 이 책과 만나게 되었다.
나는 이야기가 시작하기 전의 빈 종이 몇 장과 끝나고 이어지는 몇 장을 살펴보았다. 선물한 책들은 대체로 그곳에 뭔가가 적혀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날짜와 보낸 사람의 이름, 혹은 짧은 편지, 운이 좋으면 꽤 긴 편지가 적혀 있기도 하다. 작가의 이야기가 시작하기 전, 혹은 끝난 후의 그 공백에 독자의 인생 한 조각이 담기는 것이다.
빙고. 이 책에도 있었다. 이 책은 특이하게도 받은 사람이 보낸 사람에 대해 기록한 책이었다. 꽤 드문 케이스다.
헤헤헤 발견!
95.7.26 휴가 중 모모 씨.
나는 작게 남은 타인의 흔적을 보고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휴가라면, 직장인이었을까? 군인이었을까? 군인인 걸로 하자. 이게 더 재미있을 것 같다. 전 주인과 모모 씨 둘 중 최소 하나는 문학을 상당히 좋아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작가 지망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 95년이라면 내가 국민초등... 학생 시절인데, 그 당시엔 일 년에 한 번씩 군인에게 편지를 쓰는 시간이 있었다. 이 책을 전 주인에게 보낸 군인은 나에게 '군인 아저씨 안녕하세요?'로 시작하는 편지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어리면 열아홉, 대부분 이십 대 초반의 젊다 못해 어린 청년들에게 군인 아저씨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너무 폭력적인 언사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미안해요, 제가 그때 뭘 몰라서 그랬어요. 용서해 주세요. 이제는 정말 아저씨가 되어 버린 그대들.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 둘은 같은 학교를 다녔을지도 모르겠다. 젊은 군인 오빠는 휴가를 나와 책 주인을 만났고, 이 책을 선물하지 않았을까. 전 주인은 이 책을 받고 그날을 저기에 기록해 두었다. 전 주인에겐 기념이 될 만한 사건이었던 것이겠지. 이 짧은 문구에 담은 것은, 그를 향한 마음일 것이다.(나는 그렇게 확신한다!)
그 마음을 그에게 전했을지, 전하지 못했을지는 잘 모르겠다. 둘은 서로 좋아하는 사이었을 수도 있고, 어느 한쪽만의 사랑이었을 수도 있다.
글이 취향이 아니었을까? 너무 소중해서 조심조심 보고 잘 보관해 뒀던 것일까?책은 오래되어 누렇게 변색된 부분을 제외하고는 거의 새 책이었다.
시간이 흘러 전 주인은 어느 시점부터 이 책을 잊은 채 그와는 접점이 없는 삶을 살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한가한 주말, 책장 앞에 서서 중고 서점에 팔 책을 신중하게 골랐을 테지.
전 주인은 이 책을 발견하고 잠시간 그에 대해 떠올렸을 것이 분명하다. 이 책을 발견하자마자 미간을 찌푸렸을까? 아니면 젊은 어느 날의 설익은 추억을 떠올렸을까?
어쩌면 결혼을 하고 집을 떠난 책 주인의 어머니가 그녀의 방을 정리할 결심을 하고 주인이 떠난 방을 지키던 책들을 전부 중고 서점에 팔아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이 책에 얽힌 추억은 그녀의 인생에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기에,결국 책으로 남의 인생을 훔쳐보고 망상하는 고약한 취미를 가진 내 손에 굴러 떨어지고 만 것이다.
수많은 책들 중에 이런 이야깃거리가 담긴 책을 만나는 건 행운이다. 가끔은 일부러 그런 책을 찾기 위해 중고 서점에 가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책을 보던 중 전화를 받고 급히 연필로 누군가의 연락처를 메모해야만 했고, 어떤 어머니는 책을 읽던 중에 색연필이나 크레파스를 들고 온 작은 천사에게 습격당하기도 했다. 밥 먹는 중에도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던 지독한 독서광은 그만 실수로 라면 국물이라던가 빵 부스러기를 책에 남기고 말았다.
새 책처럼 보이는 어떤 책은 결벽증과 강박증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조심조심 읽은 책은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아 나에게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는 억울한 오해를 샀을지도 모른다.
요즘은 중고 서점에서도 책을 꽤 잘 검수해서 매입하기 때문에 이런 책을 만나려면 개인이 운영하는 중고 서점으로 가야 한다. 요즘 그런 서점을 찾기란 쉽지 않다.
대신, 전자 서적 쪽으로 가면 다른 사람이 남긴 '댓글'이라는 흔적을 읽을 수 있긴 하다. 댓글에 담긴 다른 이의 감상도 나름의 재미가 있다. 하지만 역시 나는중고책에 남은 삶의 흔적들이 좋다. 그 흔적으로 전 주인의 삶의 한 조각을 그려보는 것이 너무 즐겁다.
아아, 내 은밀하고 음침한 취미 하나가 점점 이 땅에 설 자리가 없어지는구나. 퍽 애석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