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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여사 Nov 18. 2024

중고책과 타인의 삶

그래서 둘이 무슨 사이예요? 그 뒤로 어떻게 됐어요?

 누군가의 손에 있다 들어온 책에는 어떤 식으로든 사람의 흔적이 묻어 있다. 책을 읽다 접어 놓은 흔적이라던가, 감동적인 구절이나 중요한 정보에 밑줄이 그어져 있다던가. 운이 좋으면 밑줄 친 내용 옆에 짧은 감상이 적혀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런 책을 만날 때면 혼자만의 독서 시간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이름 모를 전 주인과 함께 하는 시간이 된다.  



 여기 95년도 이상 문학상 당선작 작품집이 있다.

 나는 이 책에 실린 한 작품 때문에 이 책을 찾아다녔다. 오래된 작품이기에 구하는 게 쉽지 않았으나, 기적처럼 한 중고 서점에서 이 책과 만나게 되었다.


 나는 이야기가 시작하기 전빈 종이 몇 장과 끝나고 이어지는 몇 장을 살펴보았다. 선물한 책들은 대체로 그곳에 뭔가가 적혀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날짜와 보낸 사람의 이름, 혹은 짧은 편지, 운이 좋으면 꽤 긴 편지가 적혀 있기도 하다. 작가의 이야기가 시작하기 전, 혹은 끝난 후의 그 공백에 독자의 인생 한 조각이 담기는 것이다.   


 빙고. 이 책에도 있었다. 이 책은 특이하게도 받은 사람이 보낸 사람에 대해 기록한 책이었다. 꽤 드문 케이스다.


헤헤헤 발견!


95.7.26 휴가 중 모모 씨. 

나는 작게 남은 타인의 흔적을 보고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가라면, 직장인이었을까? 군인이었을까? 군인인 걸로 하자. 이게 더 재미있을 것 같다. 전 주인과 모모 씨 둘 중 최소 하나는 문학을 상당히 좋아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작가 지망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 95년이라면 내가 국민초등... 학생 시절인데, 그 당시엔 일 년에 한 번씩 군인에게 편지를 쓰는 시간이 있었다. 이 책을 전 주인에게 보낸 군인은 나에게 '군인 아저씨 안녕하세요?'로 시작하는 편지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어리면 열아홉, 대부분 이십 대 초반의 젊다 못해 어린 청년들에게 군인 아저씨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너무 폭력적인 언사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미안해요, 제가 그때 뭘 몰라서 그랬어요. 용서해 주세요. 이제는 정말 아저씨가 되어 버린 그대들.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 둘은 같은 학교를 다녔을지도 모르겠다. 젊은 군인 오빠는 휴가를 나와 책 주인을 만났고, 이 책을 선물하지 않았을까.  전 주인은 이 책을 받고 그날을 저기에 기록해 두었다. 전 주인에겐 기념이 될 만한 사건이었던 것이겠지. 이 짧은 문구에 담은 것은, 그를 향한 마음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확신한다!)


 그 마음을 에게 전했을지, 전하지 못했을지는 잘 모르겠다. 둘은 서로 좋아하는 사이었을 수도 있고, 어느 한쪽만의 사랑이었을 수도 다.


 글이 취향이 아니었을까? 너무 소중해서 조심조심 보고 잘 보관해 뒀던 것일까? 책은 오래되어 누렇게 변색된 부분을 제외하고는 거의 새 책이었다.


 시간이 흘러 전 주인은 어느 시점부터 이 책을 잊은 채 그와는 접점이 없는 삶을 살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한가한 주말, 책장 앞에 서서 중고 서점에 팔 책을 신중하게 골랐을 테지.


 전 주인은 이 책을 발견하고 잠시간 에 대해 떠올렸을 것이 분명하다. 이 책을 발견하자마자 미간을 찌푸렸을까? 아니면 젊은 어느 날의 설익은 추억을 떠올렸을까?


 어쩌면 결혼을 하고 집을 떠난 책 주인의 어머니가 그녀의 방을 정리할 결심을 하고 주인이 떠난 방을 지키던 책들을 전부 중고 서점에 팔아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책에 얽힌 추억은 그녀의 인생에 이상 필요하지 않았기에, 결국 책으로 남의 인생을 훔쳐보고 망상하는 고약한 취미를 가진 손에 러 떨어지고 만 것이다.




수많은 책들 중에 이런 이야깃거리가 담긴 책을 만나는 건 행운이다. 가끔은 일부러 그런 책을 찾기 위해 중고 서점에 가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책을 보던 중 전화를 받고 급히 연필로 누군가의 연락처를 메모해야만 했고,  어떤 어머니는 책을 읽던 중에 색연필이나 크레파스를 들고 온 작은 천사에게 습격당하기도 했다. 밥 먹는 중에도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던 지독한 독서광은 그만 실수로 라면 국물이라던가 빵 부스러기를 책에 남기고 말았다.


 새 책처럼 보이는 어떤 책은 결벽증과 강박증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조심조심 읽은 책은 아무런 흔적 남 않아 나에게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는 억울한 오해를 샀을지도 모른다.


 요즘은 중고 서점에서도 책을 꽤 잘 검수해서 매입하기 때문에 이런 책을 만나려면 개인이 운영하는 중고 서점으로 가야 한다. 요즘 그런 서점을 찾기란 쉽지 않다.


 대신, 전자 서적 쪽으로 가면 다른 사람이 남긴 '댓글'이라는 흔적을 읽을 수 있긴 하다. 댓글에 담긴 다른 이의 감상도 나름의 재미가 있다. 하지만 역시 나는 중고책에 남은 삶의 흔적들이 좋다. 그 흔적으로 전 주인의 삶의 한 조각을 그려보는 것이 너무 즐겁다. 


 아아, 내 은밀하고 음침한 취미 하나가 점점 이 땅에 설 자리가 없어지는구나. 퍽 애석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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