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수능이다. 수능 날마다 스산하게 추운 날씨였던 것 같은데, 이번은 이례적으로 따뜻하다. 날씨가 따뜻하거나 말거나 인생을 건 사람들에겐 혹독한 하루일 테지. 이 글을 쓰면서 타깃을 누구로 잡아야 할지 고민했다. 이곳에 고등학생이 많아 보이진 않으니, 이 글은 고3 자녀를 둔 부모님과 망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작가님들로 잡아야겠다.
나는 수능을 망친 사람이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수능을 망친 건지, 그게 내 원래 실력이었는지 긴가민가하다. 여하튼, 나는 수학을 한 자릿수 점수를 맞았고, 나를 비롯해 담임 선생님까지 충격에 휩싸였으나 재수할 돈도 에너지도 없어 그냥 그 점수로 진학을 결정했다.
전혀 생각지 못한 대학에 들어갔다. 당시에는 ‘내가 이런 데 다닐 사람이 아닌데’ 하는 건방진 생각을 하며 학교를 낮잡아 봤다. 자신은 수학 한 자릿수 점수로 여기 왔다는 소릴 하며 은연중에 ‘나는 실수를 했을 뿐, 너희랑 다르다’라는 포스를 풍기고 다녔다. 참 재수없는 타입이다. 재미있게도 그 학교에 다니는 사람 중 좀 똘똘하다 싶은 사람들 중에 나와 같은 태도인 사람이 종종 보였다. 서울대 아니고서야 어느 학교든 다 조금씩은 있는 부류가 아닐까 싶다. 어쨌든, 그 사람들 덕분에 나의 재수없음과 하찮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거울 치료를 당하고 나름 열심히 살았다. 살아보니 어딜 가나 그 조직의 수준보다 잘난 사람과 어떻게 여기 온 건지 의문인 모자란 사람이 공존하더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나마 거기서 잘난 축에 들고자 노력하는 길 밖에 없었다. 그 결과, 학교에서 빼먹을 수 있는 건 알차게 다 빼먹고 졸업을 했다.
졸업 후, 한 기업을 딱 잡고 면접을 준비했다. 서류 통과, 면접도 무난하게 통과해서 최종 면접을 앞둔 시점에 메르스라는 괴질이 창궐했다. 그 당시의 공포는 코로나 창궐 초기보다는 덜하지만, 충분히 생명의 위협을 느낄 만한 수준의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내가 지원한 회사는 메르스에 심한 타격을 받은 회사였다. 망한 거지 뭐.
그렇게 시기를 다 놓치고 나는 아무 데나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들어간 회사에서 나는 내가 일 머리가 없는 사람이라는 슬픈 사실을 깨달았다. 거기서 다른 직원들과 성격적으로 맞지 않아 고통받다 퇴사를 한다. 연속으로 망했지 뭐.
이미 자취방은 얻은 상태고, 매달 고정비가 발생하는 상황이었기에 퇴사한 당일에 바로 근처에 있는 회사 중 괜찮은 곳을 지원했다. 바로 면접이 잡히고 합격했다. 입사하고 나서 보니 유명한 회사였다. 업무량이 많고 퇴근이 힘든 곳으로. 거기다 일머리까지 없어 고생이 2배였다. 저런...... 또 망했다. 이번엔 탈출을 못했다. 일이 쉴 새 없이 밀려와 이것만 하고, 이것만 하고…… 그러다 보니 시간이 계속 흘렀고, 정신 차려보니 일이 어렵지 않아 지더라.
돌이켜 보면 그 망한 순간이 전부 내 인생이 괜찮은 방향으로 굴러가는 시작점이었다. 내가 수능을 모의고사 점수만큼 받아 원하던 학교에 갔다면, 비싼 학비에 생활비까지 내느라 공부할 시간도 제대로 갖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아도 돈이 모자라 내내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았는데, 거기에 갔다면 어떤 지옥이 펼쳐졌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다.
첫 번째로 지원한 회사에 다니게 되었다면 나는 새로운 회사에서 다른 직종으로 일을 시작하기엔 너무 늦은 나이에 코로나로 인해 잘렸을 것이다. 직장 동료와의 트러블로 그만둔 회사에 다녔다면 그 보다 더 이른 시기에 회사의 경영난으로 잘렸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초반에 망했다 생각이 들었을 때 도망쳤다면, 지금처럼 비교적 편한 조건에서 회사를 다닐 수 없었을 것이다. (다른 곳에 다녔다면 아마도 육아 문제 때문에 진작에 그만둬야 했을 것이다.)
이렇게 망할 당시에서 10년 20년이 지나서 보니 딱 새옹지마다. 망하면 내가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길이 열린다. 그 길 끝에 뭐가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당신이 아무리 똑똑해도 예상하던 것과 다른 미래가 펼쳐질 가능성이 꽤 높다.
그러니, 망한 자들이여. 비록 지금은 망했을지 모르나 인생은 전혀 망하지 않았다는 걸 명심하길 바란다. 좌절할 만큼 좌절했으면 정신 차리고 당장 해야 하는 일을 하자. 새로 열리는 길이 더 좋은 길로 이어질 수 있도록.
참고로 친척들 중에 현재 제일 잘 된 건 공부를 지지리도 못... 안 해서 꼴통 학교라 불리는 곳만 다닌 사람이랍니다. 인생이 이래요. 진짜 모른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