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없이 살아내는 마음

– 클레어 키건의 『푸른 들판을 걷다』를 읽고

by 기빙트리

책장을 펼치자, 이상하리만치 고요한 문장이 나를 맞았다.
소설은 말이 없었고, 말없는 그 문장들은 도리어 어떤 장면보다 뚜렷했다.
『푸른 들판을 걷다』는 조용하다.
그러나 그 조용함은, 깊다.
쉽게 가라앉지 않고, 오래 머문다.


표제작 속 신부는 결혼식 미사를 마치고,
외딴 숙소에 도착한다.
밤은 깊어가고, 사람은 더없이 혼자가 된다.
그 고요 속에서 그는 생각한다.
믿음, 선택, 견뎌온 시간들.
무엇 하나 또렷이 말하지 않지만,
그가 걸어온 들판의 풍경은 묵묵히 전해진다.

클레어 키건은 소리 내지 않고
한 인간의 깊은 내면을 보여준다.
사람은 왜 말을 삼키는지를,
왜 사랑을 말로 끝내지 못하는지를.


책방에 있다 보면,
많은 얼굴들이 말을 아낀 채 책을 펼친다.
오히려 말하지 않는 그 순간에,
그들이 지닌 이야기가 조심스레 흘러나온다.

『푸른 들판을 걷다』의 인물들도 그랬다.
이야기를 하지 않고, 살아내는 사람들.
고백 대신 침묵으로,
울음 대신 묵직한 체념으로,
그러나 결코 무너지지 않고 살아내는 그들.

그 안에서 나는,
누군가를 향한 깊은 배려와 체념, 그리고 아주 작은 희망을 본다.


책방 뒤켠 중정엔
장미넝쿨이 무성하게 올라왔다.
얼마전까지도 꽃 한 송이 피우지 못하더니
마침내 아침마다 잎을 더해간다.

말도 없이,
과시하지도 않고.
그저 자기의 시간을 따라 자라나는 그 풍경이
『푸른 들판을 걷다』의 인물들과 겹쳐진다.
무언가를 이루기보다,
무너지지 않으며 살아내는 삶.

책장을 덮고 나면,
크게 남는 감정은 오히려 잔잔하다.
그러나 그 여운은 오래간다.
마치 잃어버린 계절의 냄새처럼.
어쩌면 이 책은,
우리가 마음속에 묻어둔 감정의 빛깔을 조용히 비춰주는 거울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책을 오래 기억한다.
그리고 그런 책을, 누군가에게 건네고 싶다.

“이 책은 당신이 말하지 못한 마음을
조용히 이해해 줄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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