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난 책으로 부터, 다시

상실의 시대 (노르웨이 숲)

by 기빙트리

책방에서 일하다 보면 믿기 힘든 일들이 가끔 일어난다.
며칠 전엔 남녀 한 커플이 들어와 음료를 시켜 책방에서 제일 전망 좋은 자리에 앉았다.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는 듯하더니 한참 지나 우연히 보니.....

세상에 ..여자 손님은 책을 읽고, 남자 손님은 책을 베고 잠을 자는게 아닌가.

손님들이 나가고 나서 허망한 마음으로 그 남자분이 베고 잔 책을 보니,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어차피 아주 오래된 책이라 그냥 버릴까 생각하다가 젊은날의 하루키 초상을 보며

수건과 종이테이프를 가지고 책상에 앉았다.

한장씩 펼쳐서 수건으로 닦고, 낡은 부분은 종이테이프로 붙이고...
책방에서 책을 베개 삼아 자는 손님이라니. 이건 무슨 시츄에이션인가 싶었다.

그렇게 책을 ‘치료’하다가 문득 눈에 들어온 문장 하나.


“죽는 건 끔찍하지 않아. 진짜 끔찍한 건 살아 있다는 거야.”


이 책을 마지막으로 읽었던 건 20대 후반이었다.
당시에는 그저 우울하고 조용한 소설이라는 느낌만 남았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책을 닦으며 다시 마주한 문장들은 그 시절보다 훨씬 더 마음에 와 닿았다.

『상실의 시대』는
대학생 와타나베가 친구 기즈키의 자살 이후,
그의 연인이었던 나오코와 미묘한 감정 속에서 재회하며
삶과 죽음, 사랑과 상실을 오가며 성장하는 이야기다.
나오코는 기즈키의 상처와 자신 안의 불안정함을 이겨내지 못한 채,
점점 어두운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리고 와타나베는 그런 나오코 곁을 지키지만,
결국 그 곁에 끝까지 머물 수는 없다.

그 와중에 등장하는 또 다른 인물,
미도리는 활기차고 현실적인, 삶의 냄새가 나는 존재다.
와타나베는 나오코와 미도리 사이에서
자신의 감정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를 끝내 헤매게 된다.

이 책이 잔인한 건,
모든 인물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상실을 끌어안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누구도 완전히 구원받지 못한다.
그럼에도 하루키는 이야기한다 —
“그럼에도 살아내야 한다”고.

예전엔 나오코가 너무 연약하게 느껴졌고,
미도리는 너무 튀고 이기적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금 나는 안다.
우리는 누구나 어느 시절의 나오코였고,
또 어떤 순간엔 미도리처럼 삶에 매달렸다는 것을.


책방이라는 공간은 나에게 조용히 인생을 숙고하는 곳이다.
진상 손님도 있고, 책을 깊게 읽으며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도 있고,
그저 조용히 하루를 쉬어가는 이들도 있다.
그날, 누군가가 이 책을 베고 자버리는 해프닝은
어쩌면 ‘상실’의 또 다른 얼굴이었는지도 모른다.

책은 상처났지만,
그 상처 덕분에 나는 이 책을 다시 펼쳤다.
삶의 무게를 한 문장씩 다시 읽고,
그 안에서 나의 청춘, 나의 외로움, 나의 무너짐을 다시 떠올렸다.

그러니 다시 책을 닫으며 생각한다.
삶도 책도, 때론 구겨지고 찢기지만
그게 끝은 아니라는 걸.
우린 그렇게 다시 읽고, 다시 붙이며
하루를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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