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의 "그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고나서
기억은 흐르지 않는다.
흐른다는 말보다 쌓인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
그것도 제멋대로, 크기도 모양도 일정치 않은 채 차곡차곡이 아니라 너저분하게 쌓인다.
그러다 문득, 한 권의 책, 한 줄의 문장, 한 장면에 건드려져 무너진다.
박완서 작가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었을 때가 그랬다.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둔 것도 아닌데, 쌓아두었던 기억이 흘러내려왔다.
아프고, 무겁고, 어딘가 따뜻한 온기까지 품은 채로.
박완서의 유년시절.
‘박적골’이라는 지명부터 낯설고 오래되었고,
그곳에서 함께 살았던 가족들의 풍경은 조금도 꾸며지지 않았다.
이 소설은 회고라기보다는 고백에 가까웠고, 묘사라기보다는 꺼내는 일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정리하지 않은 감정들이 단어 사이사이에 스며 있었다.
늘 흰옷을 입은 할아버지의 두툼한 손과 독특했던 걸음걸이,
들판에 지천으로 피어 있던 싱아의 이파리,
시골 뒷간의 천진하고 무해했던 기억, 뙤약볕 한여름에 내리는 소나기.....
그 모든 것이 선명하게 지나가는데도,
그 모든 장면 위에는 죽음이라는 단어가 오래 눌러앉아 있다.
작가는 "내가 삼킨 죽음은 여전히 내 내부의 한가운데 가로 걸려 체증처럼 신경통처럼 내 일상을 훼방놓았다."고 했다.
그 문장을 읽고 한동안 먹먹한 마음에 눈물이 고였다.
그런 감정은 어쩌면 내 안에도 오래 있었는지도 모르기에.
나의 유년은 강원도 홍천에서 시작되었다.
1970년대의 홍천은 강원도의 작은 군사도시였다.
중심가를 벗어나면 흙먼지가 이는 비포장도로가 많았고, 봄이면 산 아래까지 연기가 내려앉은 듯 희뿌연 하늘 아래에서 아이들이 공을 차거나 숨바꼭질을 하며 놀았다.
가끔 군인들을 실은 버스가 지나갈 때면 아이들은 그 뒤를 따르며 별사탕이 들어있는 건빵을 얻어먹으려고 뛰어다녔다.
길가의 잡초와 함께 먼지가 일었고, 정류장 옆 구멍가게에선 막걸리 냄새와 사이다 병이 뒤섞인 공기가 스며 나왔다.
집집마다 처마 밑에 걸린 고무대야, 마당가에 쪼그리고 앉아 호박잎을 다듬는 어머니들,
가끔은 문짝달린 전축의 레코드판에서 들려오던 그 시절 음악까지.
그렇게 하루가 천천히, 때로는 아무 일도 없이 흘러갔다.
집 근처 홍천 성당으로 이어지는 긴 계단은 학교를 마치고 돌아가는 숨을 고르게 했고,
그 위에 올라서면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그러다.. 중학교 시절, 나는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기억의 결은 완전히 달라졌다.
풍문여고를 다니던 시절, 종로2가 종로서적 앞에서 버스를 타고 다녔다.
인사동 골목을 따라 필방.공방.화랑을 기웃거리고,
버스를 타고 서울 변두리 집까지 긴 시간을 흔들리며 돌아가던 기억.
때로는 데모로 가득 찬 거리에서 최루탄 냄새를 맡으며 숨을 참아야 했다.
그 길들은 유년을 떠나온 나에게, 또 다른 성장의 계절을 안겨주었다.
낯설고 복잡했지만 동시에 강렬하게 나를 자극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그 자체로 하나의 긴 숨이었다.
작가가 숨을 멈추지 않고 꾹꾹 눌러 써 내려간 생의 한 자국.
그 글은 완결을 향해 흐르지만, 결코 정리되거나 닫히지 않는다.
오히려 마무리의 순간에 다시 시작되는 또 다른 문장처럼, 기억은 살아 숨쉰다.
그 기억들이 결국 작가를 만들고, 우리를 독자로 머무르게 한다.
작가는 유년과 학창 시절, 제 손으로 쥐지도 못했던 비극을 감당하며 자라야 했다.
해방과 전쟁, 여성이라는 이유로 겪어야 했던 억압과 불안, 어머니가 품어야 했던 침묵 속의 고통까지.
싱아를 씹으며 느꼈던 신맛처럼, 그녀의 지난 시절은 입 안에 오래 남는 떫은 감정이었다.
회상은 부드럽지 않았다.
고향을 떠나와 자리잡은 서울 사대문 밖 현저동은
자상한 어른도, 다정한 친구도, 그녀를 충분히 품어주는 공간도 없었다.
그럼에도 작가는 그 기억들을 쓰고 또 썼다.
그녀에게 글쓰기는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자, 고통을 봉합하는 방식이었다.
어떤 회상은 편안하지 않다.
어떤 기억은 여전히 상처처럼 남아 있다.
그러나 작가는 그것을 견디며 쓴다.
쓰기 위해 견디고, 견디기 위해 쓴다.
나 역시 지금 이 순간, 회상으로부터 다시 글을 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유년에도... 말하지 못한 상실이 있었고, 잊은 줄 알았던 장면들이 있었다.
그 기억은 때때로 나를 불러 세운다.
오래 전 홍천 성당의 높다란 계단의 끝,
숨을 헐떡이며 올려다 보던 종탑과 아래에서 느꼈던 막연한 두려움과 희망처럼.
한때의 슬픔을 어루만지는 손길로,
혹은 아직도 삼키지 못한 감정의 응어리를 천천히 꺼내는 마음으로.
나는 다시 문장을 꺼낸다.
그리고 그 문장 사이에, 지워지지 않는 나의 시간들이 조용히 스며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