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나 있는_#브라질 핸드드립

- 6화 -

by 구너

희영이 무리는 더 이상 나를 귀찮게 하지 않았고, 민정이와 나는 예전처럼 늘 붙어 다녔다.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민정이의 개그가 조금 아재스러워졌달까? 그건 어찌 됐건 좋은 일이었다. 예전 민정이 보다 훨씬 밝아 보였기 때문이다. 조금씩 기억나는 예전의 민정이는 매력적이었지만 어쩐지 슬퍼 보이는 쪽에 가까웠으니까. 드디어 민정이에게도 조금 촌스럽지만 유머의 방이 생겼다.


얼마든지 웃겨봐 내가 언제나 웃어 줄 테니.


내가 학교에 돌아오고 민정이가 나에게 돌아오자 학교는 평범한 일상의 모습이 되었다. 난 여전히 수업시간에 잤고 자지 않을 땐 창문 밖을 멍하니 바라보거나 웹툰을 읽었다.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같은 반 친구들이 나를 의도적으로 배려하는 느낌이 들었다. 반 친구들은 종종 나를 힐끗힐끗 쳐다봤고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어색하지만 최선을 다해 웃어주었다. 말을 걸 때도 조심조심 단어를 선택한다는 느낌을 주었다. 난 괜찮은데 오히려 자기들이 유난인 게 웃기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친구들의 표정 외에도 또 달라진 것이 있었다. 2학년 2학기가 되자 체육시간은 거의 필기 시간으로 바뀌었다. 말이 필기 시간이고 거의 사라진 거나 다름없었다. 선생님은 교탁 옆에 앉아 태블릿 PC를 들여다보고 계셨고, 아이들은 저마다 수학 책, 국어 책, 영어 책을 펼쳐 공부를 하거나 부족한 잠을 채웠다. 다른 수업시간에도 끊임없이 자는 나는 잠이 부족하진 않았지만 또 엎드렸다.


- 따라라란 따라란 따라리리딴다단 -

종소리가 희미하게 들렸지만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지소연”


“으응? 벌써 쉬는 시간이야?”


“또 잤어? 겨울도 봄도 아닌데 왜 이렇게 잠만 자.”


“겨울이면 곰이고 봄이면 사람이라 이거지?”


“그래. 근데 지금은 여름이라고.”


“여름도 다 지나갔지 뭐. 우리 바다 갈래?”


“바다?”


“응. 너 바다 좋아하잖아.”


“지금 가긴 좀 그렇잖아.”

물론 지금 당장 출발할 생각은 없었지만 민정이가 바다를 마다하다니 정말 의아했다.


“알았어. 그래도 가고 싶어 지면 말해.”


“응. 일단 바다 말고 오늘 뒷산 가자.”


“언제나 환영이죠. 이번에는 내가 주스 살게.”


“웬 주스?”


“엥? 너 쥬시팡팡에서 늘 마시던 거.”


“아, 아아 그거? 되게 달던데”


“왜? 이제 단 거 안 마셔?”


“... 응?”


“왜 그래?”


“뭐가? 요즘 단 거 안 마셔.”


“안 마실 거면 말고, 그냥 가자 그럼.”


“응. 헤헤.”


오랜만에 오른 뒷산은 우리가 자주 밟아주지 않아서인지 우리가 헤집어 놓은 흙길에도 잡초가 무성히 자라 있었다. 잡초뿐이 아니었다. 기억 속 뒷산의 초입은 담배와 온갖 쓰레기 때문에 늘 한 손으로는 코를 늘 막고 지나쳐야 했는데 그동안 미화부가 일을 잘 한 건지 쓰레기는커녕 누가 일부러 가꾸어 놓은 화단처럼 꽃이 촘촘하게 심어져 있었다.


“이게 다 뭐야.”


“뭐가?”


“언제 이렇게 꽃을 심어놨데.”


“글쎄.”


“덕분에 우리 꽁초 못 구하겠네.”


“꽁초?”

민정이가 동그랗게 눈을 뜨고 물었다.


“뭐야. 너 오늘 진짜 이상해.”


“담배 피지 마.”


“큭. 누가 할 소리.”


“... 너 때문인 거 같아.”


“뭐라고?”


“내가 담배 피우는 거 너 때문인 거 같다고. 네가 여기서 자꾸 꽁초를 주우니까!”


“야. 유민정.”


“왜!”


“너 오늘 진짜 이상해. 나만 폈어? 너 중1 때부터 폈다며. 집에서도 피는데 엄마 아빠는 모른다고 진짜 웃기지 않냐고. 나도 한 번 펴보라고 네가 가르쳐 줬잖아! 무슨 소리야 자꾸!”


“... 거짓말”


“야, 나 내려갈래. 너 혼자 노을을 보든 그리든 알아서 해.”


이상했다. 내 기억이 잘 못 된 건지 민정이가 변한 건지 민정이는 자꾸만 이상한 소리를 한다. 뒷산을 다 오르지도 못한 채 그렇게 싸우고 먼저 내려와 버렸다. 민정이에게 화를 냈고, 난 곧 후회를 하겠지만 내가 기억하던 민정이의 모습이 아니라 참을 수 없었다. 못 견딜 만큼 화가 났다. 바다를 마다하고, 담배를 싫어하고, 주스를 마시지 않는 유민정이라고? 그럴 수는 없다. 그러면 안 되는 거다.


*


- 아악!!!!


“왜 그래 소연아!?”


“헉.. 헉... 엄마... 무서워”


“왜 소연아 왜. 엄마 여기 있어. 악몽 꿨구나?”


“응.. 흑흑 엄마 흑흑 자꾸... 민정이가 나를 잡아끌어. 근데 그게 흑흑... 거기가 너무 어두워...”


“괜찮아. 괜찮아. 아이고 우리 딸. 울지 마.”


“엄마.. 흐... 흐흑”


“딸, 오늘 하루 학교 쉴까?”


“응. 못 가겠어.”


요즘 자꾸 악몽을 꾼다. 민정이와 뒷산을 오르거나 생소한 길을 걷다 갑자기 장애물을 만나고, 그걸 피해 도망치다 넘어지고, 넘어진 나를 민정이가 어디론가 데려가려고 하는데 그 표정이, 모습이, 분위기가 너무 무섭다. 그리고 그 꿈은 약을 먹든 안 먹든 계속 반복되었다.


“선생님께 말씀드렸어. 오늘 쉬자.”


“엄마.”


“응?”


“우리 모녀 데이트 하자.”


“좋지.”


실로 오랜만에 엄마와 함께 하는 데이트다. 꾸준한 치료와 함께, 몇 번 다투긴 했지만 학교에서 민정이와 잘 지내기 시작하면서 공황장애는 거의 완치 수준이었다. 약을 완벽하게 끊은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꽤 있는 곳에 가서도 예전처럼 숨 막히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다시 찾은 일상의 자유를 누릴 겸 엄마와 영화를 보고 오래간만에 이탈리아 레스토랑에 들러 배를 채우고 아이쇼핑을 하다 시장에서 찬 재료를 사 올 계획이다.


“엄마도 영화관 오랜만이지?”


“그러네. 딸이랑 온 건 더 오랜만인 거 같다.”


“내가 늘 친구들이랑만 다녔나 봐. 미안해 이제 엄마도 챙길게.”


“벌써 우리 딸이 날 챙길 나이야? 아니야~ 엄마 아직 젊다?”


“아니~ 큭큭. 늙었다는 게 아니고.”


“콜라 마실 거니?”


“커피 마셔도 돼?”


“술도 아닌데 뭘 물어. 그럼 아메리카노 두 잔 사 올게. 어디 앉아 있어.”


“음... 나 아메리카노 말고 브라질 핸드드립. 아냐 엄마 같이 가.”


“그럴래?”


커피 메뉴판에는 글씨가 가득했다. 오늘의 음료부터 생소한 이름까지. 이 많은 이름 중에 나는 ‘브라질’을 찾는다. 나에게 브라질 원두 맛을 알려준 것도 민정이다. 커피 메뉴판을 보고 있으니 민정이 와의 일화가 하나 더 기억났다.


민정이는 늘 직접 집에서 내린 커피를 텀블러에 담아왔다. 그리곤 내가 뽑은 자판기 커피와 바꾸어 마셨다. 민정이의 텀블러 커피는 민정이 엄마가 매일 아침 직접 내려주시는 핸드드립이었다. 민정이는 나와 친해지기 전에는 그 커피를 항상 버렸다고 했다. 아줌마는 바리스타였고 직접 내려준 그 커피는 향과 맛이 일품이었지만 민정이는 늘 그 커피를 버리고 대신 노을이라 말하던 주스나 자판기 커피를 마셨다.


“왜 그래?”


“뭐가?”


“왜 버려? 향 좋은데.”


“향은 좋지. 근데 난 달콤한 게 좋아.”


“그럼 시럽을 넣으면 되잖아.”


“맞아. 시럽을 넣으면 되는데. 그 간단한 걸.”


“풉 뭐야. 바보냐? 그 간단한 걸 왜 안 해. 헤이즐넛? 그 시럽도 맛있더라! 넣어봐.”


“헤이즐넛 시럽은 향이 너무 강해. 이 브라질 원두 향을 헤치잖아.”


“오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럼 무향 시럽은 없어? 바닐라 시럽도 바닐라 향은 있을 거 같고.”


“응. 있는데 없어. 우리 엄마한테 시럽은 암모니아거든.”


“응?”


“그런 게 있어.”


“뭐야~ 그럼 나 줘.”


“뭐?”


“그럼 그 커피 나 주라고. 향도 좋고 먹어보고 싶어. 내가 자판기 커피 사줄게. 서로 교환해.”


“하하하. 그러면 되겠다. 나도 엄마한테 덜 미안하고.”


“그래~ 내일부터 나 줘야 해.”


“좋아.”


그렇게 매일 나는 고급 브라질 원두커피를 300원에 마실 수 있었다. 핸드 드립이 더 비싸고 고급 커피라는 건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좋은 맛과 향에 취해서 이 좋은 걸 왜 안 마시는지에 대한 고민은 잊혔다. 난 브라질 핸드드립을 좋아하게 되었고 내 옆에서 달달한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 민정이도 똑같이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


“영화 재밌네.”


“다행이다. 나는 좀 지루했어.”


“좀 그래 보이더라. 근데 어떤 점이?”


“너무 뻔한 해피 엔딩이잖아.”


“그래도 해피 엔딩이 좋지 않니?”


“좋지. 세상에 새드엔딩이 너무 넘쳐나니깐 영화라도 해피 엔딩이어야지.”


“엄마는 소연이 인생도 해피 엔딩이면 좋겠어.”


“인생에 해피 엔딩이 어디 있고, 새드 엔딩이 어디 있어. 그냥 사는 거지.”


“와, 소연이가 엄마보다 어른 같네.”


“헤헤. 나 많이 컸지?”


사실 브라질 커피 향을 맡고 나서 뭔가 모르게 초조해졌다. 분명 좋아하던 커피 향이었는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와 영화에 잘 집중하지 못했다. 엄마에게는 또 아프다 소릴 하기 싫어 그냥 영화가 지루 한 척 팔걸이에 머릴 괴고 있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는 쇼핑몰의 옷가게 이곳저곳 둘러보았다. 엄마는 자꾸 이 옷도 예쁘고 저 옷도 잘 어울린다며 점원보다도 더 나의 쇼핑을 부추겼지만 난 마음에 드는 옷이 없었다. 몇 개월 동안 집 밖에 나가지도 않고, 먹고 자고 했더니 내 인생 최대의 몸무게를 찍었을 뿐 아니라 예쁜 옷을 산다 해도 입고 갈 곳이 마땅찮았다. 민정이랑 바다나 가면 모를까.


“소연아 회색 한 번 입어볼래?”


“아냐 됐어. 그냥 가자~”


“어우 왜. 회색이 잘 받을 거 같아. 더 고급지고.”


“엄마 그러지 말고 저기 보여?”


“어디? 뭐?”


“저기 카페”


“...”


“저기 poupée cafe 안 보여?”


“아~ 저기~? 어머 얘는... 오늘 커피 마셨잖아~”


“응. 근데 저기 마카롱이랑 브라질 커피가 진짜 죽여줘. 좀 비싸서 그렇지.”


“그래? 저, 저긴 또 언제 가봤데...”


“어? 내가 말 안 했었나? 저기 민정이 엄마가 하시는 카페야. 저기 브라질 핸드드립이 진짜 맛있다?”


“아~ 그, 그래 맞네. 들었던 거 같기도 하네.”


“왜 이렇게 말을 더듬어 엄마~”


“내가 언제. 어휴 난 커피 두 잔 마시면 잠을 못 자서. 다음에 가자. 다음에.”


“알았어~ 그럼 엄마 옷이나 사러 갈까? 난 사고 싶은 것도 없고.”


“엄마도 별로.”


“그러지 말고~ 엄마 머리끈이라도 사러 갈까? 내가 곱창 사줄게!”


“그 곱창 말고 순이네 곱창이 더 좋은데 엄만”


“크크 뭐야. 저기 가판대 가보자.”


“그래그래.”


옷에서 액세서리, 액세서리에서 신발, 신발에서 다시 모자로 우리의 관심사는 옮겨졌다. 그렇게 많은 가게를 다녀도 역시 시장만큼 재미있는 곳은 없었다. 엄마는 오징어를 실컷 만져 보더니 너무 작다고 투덜대고는 고등어를 골랐다. 투덜거렸지만 그 어떤 옷가게에서 보다 엄마의 눈은 빛났다.


“엄마 우리 꽈배기 먹자.”


“그래.”

갓 뽑아낸 꽈배기를 튀기는 소리가 냄새만큼이나 식욕을 자극했다. 시장에서 설탕을 듬뿍 묻혀 먹는 꽈배기는 쉽게 지나칠 수 있는 것이 못된다. 살은 더 찌겠지만 뭐 어쩌랴.


“어머~ 선하 엄마, 여기서 보네.”


“아이고, 우리 소연이 아니야?”


선하네 어머니가 꽈배기를 사고 있었다. 예전부터 선하 어머니는 유독 날 다정스레 대해줬다. 선하와 엄청나게 친한 건 아니었지만 한 동네에서 유치원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함께 다녔으니 어릴 땐 서로 집에 종종 놀러 가기도 했고, 무엇보다 엄마들끼리 잘 알았다.


“네. 안녕하세요.”


“오늘 학교 안 가고 우리 데이트 중이야.”


“아이고 좋다야. 나도 선하랑 그러고 싶은데 이 지지배는 다이어트랑 남자 친구밖에 몰라.”


“그 나이 때 다 그렇지 뭐.”


“몰라서 그래. 난... 어후 걱정이야. 왜 그리 살 빼는 데에 집착을 하는지. 그만 빼도 되는데, 지금이 딱 예쁘구먼.”


“그러게 언니. 요즘 애들은 정말 다 말라깽이가 되고 싶어 안달 인가 봐.”


아줌마와 엄마의 대화가 길어지는 것 같아, 슬쩍 옆으로 자리를 피해 자동차 진입 금지 말뚝에 위태롭게 걸터앉았다. 시장 풍경을 보고 있자니 재미있었다. 어떤 사람은 머리에 쟁반을 이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면서도 보이는 사람마다 안녕하냐고 야단스럽게 인사를 했지만 쟁반은 신기하게 흔들림이 없었다. 또 떡집 아줌마는 전날 아저씨가 술을 많이 드셨는지 아직까지 잔소리를 하고 계셨고, 한 아줌마는 짐을 양손 가득 들고 있으면서도 한 가게 한 가게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기웃기웃 구경했다. 시장의 모습은 저마다 달랐지만 모두 살아있었다.


엄마와 아줌마는 꽈배기가 다 식을 때까지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때였다. 시장의 모습들이, 그 생동감 있던 모습들이 뿌옇게 흐려졌다. 들고 있던 봉지를 툭 하고 떨어뜨리고 말뚝에서 내려와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 어지러워...”


갑자기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렸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누구야? 뭐가? 뭐가 아니라는 거야. 왜 아니라는 거야! 꿈이야 뭐야!

또 악몽인가, 혼란스러웠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뭐야 왜 앞이 안 보여. 왜 앞이 안 보여...


“엄마! 엄마!”


보일 듯 말 듯 한 엄마를 향해 팔을 뻗고 불러보았는데 꼭 가위에 눌린 것처럼 말이 입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것은 내 방 천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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