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여진 글 | 터레끼로 살고 싶어(19금)
터레끼는 비범한데, 쓰레기는 예뻐졌어
쓰여진 글 :
잠결에, 무의식 중에, 나도 모르게
아래 글은 저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메모장에 남겨진 이야기입니다. 신비로운 이야기를 말해준 어떤 존재가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은 그 존재를 비존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누군가는 이런 이야기에 거부감을 느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제가 들을 바를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 저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신들린 듯이 글을 썼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저는 신이라는 말 보다 자각하지 않은 상태에서 쓰여진 글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떤 몰입감에 의해 신나서 글이 잘 써진 것과도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쓰인’을 ‘쓰여진’ 이라며 구태여 오타를 고집하는 이유는 제가 썼지만 썼다고 인식할 수 없는 상태였기에 강조하는 것입니다.
꿈에서 문장을 만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꿈이 아닌 현실에서 문장을 만나는 일은 과거에 쓰인 내 문장을 미래에 본 일에 가깝습니다. 글을 쓰고 싶어서 생긴 해프닝치곤 기억에 남지 않은 상태를 만들어 냈기에 권유할 수 있는 글쓰기는 아닙니다. ‘쓰여진’ 글을 쓰고 저는 병원에 갔고 1년이 지난 상태에서야 그때 상황이 기절한 것과 다름없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기절이라는 표현도 없앨지도 모릅니다. 청소년기의 사람들에겐 제 글을 추천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신경 쓰고 있습니다.
가끔 우리는 신과 대화를 나누길 희망합니다. 의지할 게 필요한 모든 비종교인도요. 종교를 믿는 것과 신을 사랑하는 것은 저에게만큼은 다른 일입니다. 비존재를 의지에 따라 신이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영혼의 도움이라고 여겨도 좋습니다. 작가가 되길 희망하는 사람들, 구원이 필요할 만큼 절실한 사람들, 꿈이 이뤄지길 바라는 사람들 모두에게 ‘쓰이고 쓰여진’ 이 글이 꿈과 희망이 되길 바랍니다.
아참, 나중에서야 마지막 글은 막스 베버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막스 베버가 누군지 잘 모릅니다. 검색을 통해서야 사회학자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막스 베버의 어느 글 2.2.2에서 현세적이라는 단어를 발견하고 나서야 왜 제가 일상에서 한 번도 쓰지 않는 용어가 제 메모장에 존재하게 됐는지 알게 됐습니다. 사실 현세적이라는 말의 뜻도 저는 몰랐습니다. ‘현세적’을 검색한 후에 막스 베버를 알게 됐는지 지금은 확실하지 않아 졌습니다. 숫자 2를 좋아하고 현세적이라는 언어가 궁금했던 저에게 막스 베버라는 사회학자가 이끌려 온 것인지도 모릅니다.
결국 쓰였다는 말이 어울리지만 제가 쓴, 쓰인 글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하기까지 1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신성의 말이라고 여겼던 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것을 넘어 알려주는 무언가가 귀찮을 정도로 세세한 생활의 일부까지 제 꿈을 돕도록 노력해줬습니다.
222는 저에게 기적 같은 언어입니다. 저는 숫자 2의 연속을 보고 어떤 상징과도 같은 힌트를 얻습니다. 꿈이 있다면 이루어질 것이고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만나게 될 것입니다. 숫자와 관련된 저의 에피소드는 또 다른 방식으로 독자들을 만나길 바랍니다. 장담하건데 '꿈의 해석'보다 쉽고 즐겁게 읽으실 수 있을겁니다.
어떤 글은 분명히 제가 쓴 글임에도 누군가의 글로 여겨집니다. 노심초사할 정도로 신중을 다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제가 겪었던 일을 누군가 똑같이 따라 하길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필요한 모방이라 생각합니다. 그때 겪었던 불안한 감정들을 조금이라도 피하고 싶었습니다. 기적 같은 글 쓰기를 체험했지만 2주는 안정제를 먹어야 했습니다. 꿈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성공의 열망이 저를 이끌어준 것이지 결코 가족들을 힘들게 하고 싶진 않았습니다. 물심양면으로 계속 글을 쓸 수 있도록 도와준 가족들에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