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에 피크엔드 법칙이라는 개념이 있다. 행동경제학의 창시자라 불리는 다니엘 카네만과 연구진의 논문을 통해 알려진 이 개념은, 사람들이 과거의 기억을 평가할 때 경험 전체를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절정(Peak)의 순간과 가장 마지막(End) 순간의 감정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개념이 사람 간의 관계에도 성립한다고 생각한다. 나와 인연을 맺고 있는 사람마다 각각의 강렬한 기억이 하나쯤 있을 것이다. 그것이 나에게 도움이 되었거나 즐거웠다면 그 사람은 내게 긍정적으로 평가될 것이고, 나도 모르게 그를 찾게 된다. 하지만 불미스러운 일이 한 번 발생하게 되면, 그 관계는 꽤 오래 부정적인 상태로 남기도 한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뜻대로 되는 일이 거의 없다. 아이들이 자기 주관을 갖기 시작하면 부모의 지시대로 한 번에 행동하는 일은 점점 줄어든다. 아이들은 본인 뜻대로 되지 않으면 30분이고 1시간이고 울어댔고, 나는 좋은 습관을 길러줘야 한다는 강박과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 사이의 괴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원래 인내심이 많은 사람도 아닐뿐더러 떨어진 체력과 비례하게 참을성은 바닥을 쳤다. 그런 날들이 한동안 계속되자 마치 퓨즈가 탁 내려가듯, 정신을 차려보니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고 있었다. 지금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아마 그 간에 쌓인 것이 일순간 탁 하고 터져버린 것 같다. 처음이 쉽다고 한 번 물꼬가 트이자, 나는 점점 더 자주 아이들에게 화를 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 둘이서 아기 놀이를 하길래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엄마를 흉내 내던 둘째 아이가 방으로 첫째 아이를 데려가더니 버럭 화를 내며 혼쭐을 내지 뭔가. 내가 혼내며 하는 말을 그대로 따라 하면서 말이다. 이렇게 직접 눈으로 보니,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싶었다. 모난 나의 모습을 거울로 본 것 같이 부끄러웠고, 아이에게 날 서고 못된 말들을 가슴에 새겨 준 것 같아 미안했다. 무엇보다 이렇게 화내는 엄마로 기억에 계속 남는 건 아닐까 두려웠다.
그날 이후 시간은 좀 걸렸지만, 화내는 걸 고치기 위해 책도 읽고, 상담도 받아 가며 정말 많은 노력을 했다. 지금도 인내심이 바닥날 것 같을 때에는 피크엔드 법칙을 떠올리며,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엄마로 기억되기 위해 애쓰고 있다.
피크엔드 법칙은 업무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UX/UI의 10가지 심리학 법칙>이라는 책에서는 피크엔드 법칙을 소개하며, 사용자가 제품 또는 서비스를 이용하는 여정에서 가장 강렬한 순간과 마지막 순간을 세심하게 신경 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때문에 좋은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해당 제품이 사용자에게 큰 도움을 주는 순간이나 가장 중요한 순간, 또는 즐거움을 주는 순간을 알아내야 한다.
기획자인 나는 서비스를 기획하거나 운영할 때뿐만 아니라, 특히 협업을 할 때에도 이 개념을 염두에 둔다. 회사도 결국 사람이 모여있는 곳이고, 협업자들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업무 과정부터 결과까지 너무나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기획자는 디자이너와 개발 부서뿐만 아니라, 법무나 사업 담당 등 정말 다양한 부서와 협업한다. 협업을 단순히 여러 부서가 모여 일을 하는 것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신임 리더이던 나는 팀의 입지를 탄탄하게 하기 위한 방법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 협업을 잘 활용해 동료들이 찾는 팀을 만들 수 있다고 판단했다. 나와 우리 팀에게 든든한 아군을 만들고자 한 것이다. 우리는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하나의 프러덕트를 만들어나간다. 하지만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부서마다 프로젝트를 통해 달성해야 하는 목표도, 중점을 두는 바도 다르다. 이 협업 과정에 피크엔드 법칙을 적용해 보려면, 우리 팀을 하나의 제품이나 서비스로 바라볼 필요가 있었다. 다른 팀 동료들이 기획 팀을 필요로 하는 순간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내가 관찰해 본 결과는 두 가지였다. 우선 예상했던 것처럼 조직으로 전달되는 요구사항과 기술적 해결방안을 사용자 관점으로 해석하는 역할을 기대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상위 보고나 유관 부서에 프로젝트를 공유하는 등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기획자의 도움이 필요해 보였다. 이미 팀원들의 기획 실력에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기획적 해석 부분은 팀원들에게 맡겼고, 나는 보고나 외부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문서 작업과 프레젠테이션에 집중했다. 나 역시 모든 것이 처음이었기에 과정이 쉽진 않았지만, 동료들이 필요한 때에 적합한 도움을 주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그 효과를 체감하는 데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마다 우리 팀의 필요성은 더욱 명확하게 느껴졌고, 다른 팀 동료들이 나와 팀원들을 대하는 태도가 눈에 띄게 우호적이 되었다. 협업에 대한 평판은 자연스럽게 상위 직책자에게도 전달되었고, 이를 통해 기획 팀이 적어도 조직에 필요한 부서로 평가받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에겐 사회 초년생 시절부터 잊지 않고 꺼내보는 말이 있다. 당시 따르던 리더의 조언이었는데, 정확히 문장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의미는 이러했다.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 필요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것이, 당장 조직장 눈에 잘 보이는 것보다 훨씬 큰 결실을 가져다줄 것이다.' 그 말의 힘을 온전히 실감하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