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방 입구 쪽에 놓인 하얀색 서랍장.
처음엔 서랍장 위에 과일을 올려놓았는데, 과일 옆에 물티슈, 물티슈 옆에 비타민, 비타민 위에 털뭉치 간식 등등 점점 많은 물건들이 그 위에, 옆에 쌓이기 시작했다.
오가며 바로바로 쓸 수 있다는 편리함이 있다 보니 서랍장 위를 치워도 다른 무언가가 어느새 자리를 차지하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언제 한번 치워야지 생각하면서도 엄두가 나지 않아 미루고 있었는데, 할 일이 너무 많아 어느 것부터 해야 할지 막막하고 답답했던 날. 덥수룩하게 쌓인 물건들이 눈에 딱 들어왔다.
그래, 오늘이다!
위에 쌓여있는 녀석들을 다 내려놓고 서랍을 열어 물건들을 꺼내자 작은 서랍장 하나에서 나온 물건들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많은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문구류부터 다이소에서 산 크고 작은 물건들, 있는지도 몰랐던 그릇세트들 등등 끝도 없이 토해내는 서랍장을 보며 괜히 꺼냈다 싶었다. 시간을 몇 분 전으로 돌릴 수 있다면 다음으로 미룰 것이다. 해야 할 일을 회피하려고 다른 일을 벌인 내가 야속했지만 언젠가는 해야 할 일.
버릴 물건을 분류하려고 보니 모두들 나름의 쓸모를 뽐내며 나를 째려보는 것 같았다. 안 되겠다 싶어서 자주 쓰지 않는 물건과 자주 쓰는 물건으로 나누어보았다.
생각보다 많은 물건들이 거의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언제든 쓸 수 있는 멀쩡한 상태 혹은 아예 포장도 뜯지 않은 새것이어서 여기에 속한 친구들은 기증을 하기로 마음먹고 박스에 따로 담았다. 나머지 자주 사용하는 물품은 모아서 다른 서랍으로 강제이주 시켰다.
아무리 정리를 해도 서랍장이 여기 있는 한 또 물건이 쌓일 수 있으므로 아예 서랍장도 비워버렸다.
요긴하게 사용했던 가구인만큼 빈자리가 큰 것이 당연하기에 불편함을 감수하고 비웠는데 어찌 된 일인지 빈자리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오히려 서랍장이 빠져나간 주방 입구 공간은 막힌 곳 없이 뻥 뚫린 단정한 공간이 되었고 어떤 가구를 들여놓았을 때보다도 더 큰 만족감을 그 빈 공간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비우고 나니 이렇게 좋은데 왜 이제까지 끌어안고 살았나 싶을 정도로 볼 때마다 만족감이 컸다.
비어있는 이 공간을 다른 가구나 물건들로 채우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해야 할 많은 일들,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로 복잡했던 머릿속이 깨끗하게 비워진 공간을 보니 박하사탕을 입에 물고 숨을 크게 들이쉰 것처럼 시원해졌다.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갖고 있는 물건들이 아직 집안 곳곳에 있다. 비움으로 인해 느껴지는 커다란 만족감이 여러 번의 요요를 겪으며 외면하게 됐던 미니멀의 꿈을 손짓하며 다시 소환하려 한다.
그것이 공간이든, 마음이든, 시간이든, 사람이든 비어있는 상태를 견디지 못해 서둘러 원치도 않는 것으로 메꾸듯 살지 않기!
비어있음으로 인해 느껴지는 감정이 때론 불편하고 불안해지더라도 있는 그대로 오롯이 느껴보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