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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Nov 17. 2020

김렛(Gimlet)은 필립 말로와 함께

-      진 : 라임 주스 = 1:1

지친 탐정이 있습니다. 돈은 없고 일이 잘 풀리는 것도, 성공한 것도 아니지만 자존심만은 꼿꼿하지요. 바싸고 화려한 술 집 앞에서 엉망으로 취해 개처럼 버려진 젊은 남자를 부축해 집까지 데려다줍니다. 이유는 없습니다. 술에 취해 제대로 걸을 수도 없지만, 백발과 흉터 있는 얼굴, 맑은 목소리와 예의 바른 태도를 가진 남자의 어떤 부분이 마음에 와 닿았기 때문입니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 두 사람은 바에 앉아 ‘김렛’을 몇 잔이고 마십니다. 영국인은 아니라고 자신을 소개한 백발의, 흉터 있는 남자가 말합니다.


“여기 사람들은 김렛 만드는 법을 잘 모릅니다. 사람들이 김렛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냥 라임이나 레몬주스와 진을 섞고 설탕이나 비터를 약간 탄 것에 지나지 않아요. 진짜 김렛은 진 반, 로즈 사의 라임주스 반을 섞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섞지 않는 거죠.”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 ‘기나긴 이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레이먼드 들러는 제가 좋아하는 소설가 중 하나고 이 소설의 주인공인 ‘필립 말로’는 그야말로 저의 ‘최애’ 캐릭터입니다. 번역된 책은 전부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미드 ‘프렌즈’ 배역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역할도 메튜 페리가 연기한 ‘챈들러’입니다. 이름이 같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어요.  


이 소설에서 ‘김렛’은 중요한 소재로 사용됩니다. ‘김렛’은 테리(백발의, 흉터 있는 남자의 이름이 ‘테리’입니다)가 말한 것처럼 ‘진’과 ‘라임주스’를 섞어서 만듭니다. 19세기 영국 해군의 배에서는 장교에게는 ‘진’을 배급했다고 합니다. 선원에게는 ‘라임주스’를 나눠주었죠. 당시 비타민 부족으로 배에서 괴혈병이 도는 것을 막기 위한 궁여지책이었습니다. ‘진’은 40도가 넘는 독한 술입니다. 그냥 마시기는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 군의관이었던 ‘김렛 경’이 진과 라임 주스를 섞어 마시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기원이 되었다고 합니다(믿거나 말거나의 중간 정도에 진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소설의 스포를 조금 하자면, 테리는 전직 영국군 소속이었습니다. 그가 ‘김렛’에 대해 까탈스러웠던 이유죠. 어쩐지 설득력이 있지요?



제가 사랑하는 ‘필립 말로’는 묘한 사람입니다. 그가 살고 있는 세계, 1940 ~ 50년대의 미국은 아무리 좋게 말해줘도 ‘타락한 세계’입니다. 치정과 복수가 난무하고 갱이 경찰을 두들겨 패는 무법의 공간입니다. 권력과 돈이면 안 되는 일이 없습니다. 살인 사건 하나쯤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묻을 수도 있죠. 뭐, 지금 세상과 비슷하다고 하면 너무 나간 걸까요? 할 수 없는 것이라면 ‘필립 말로의 입을 닫는 일’ 정도입니다.


그런 세상에서도 필립 말로는 낯선 주정뱅이를 구해줄 만큼 감상적이고, 도망치려는 사람에게 이유를 묻지 않고 도와줄 만큼 무모합니다. 그의 행방을 추궁하는 경찰들에게 비밀을 지키기 위해 며칠 동안 유치장에 갇히는 것도 감수하지요. 그를 빈정대는 경찰에게 이렇게 소리칩니다.


“나는 낭만주의자예요. 밤에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러 가죠. 이런 식으로 하면 땡전 한 푼 못 벌어요.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창문을 닫고 TV 소리를 더 높이겠죠. 아니면, 재빨리 속도를 내서 그 자리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에 상관해봤자 지저분해질 뿐이거든요……. 당신이라면 그렇게 안 할 겁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좋은 경찰이고 나는 사립 탐정밖에 못 되는 거죠……. 수임료 같은 건 전혀 없었어요. 아무것도 없었어요. 때로 내 얼굴이 뭉개지기도 하고, 감옥에 처박히기도 하고, 위협을 당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게 답니다.”



레이먼드 챈들러가 활동하던 20세기 중반(이 소설은 1954년에 출간됩니다)보다 지금이 ‘덜’ 타락했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네요. 구조를 이해하기도 힘든 사기 사건이 벌어지고 손해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돌아갑니다.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사적인 폭력도 서슴지 않고 사용합니다. 이래저래 보통의 사람들은 버티기 힘든 세상이지요. 언제 맞았는지도 모르고 뒤통수를 부여잡게 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내 한 몸 돌보기도 힘들어서 타인에게 신경 쓸 여력 같은 것을 내기도 어렵습니다. 진정한 사랑 같은 것은 드라마에서나 구경할 수 있을 뿐이죠. 그러니 마초 같은 구석이 많아 가끔 마음에 안 드는 적도 있지만 ‘필립 말로’라는 캐릭터에 애정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적어도 그는 주위를 돌아볼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1950년대는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자본주의의 전성기를 향해가는 시기였습니다. 신흥 부자가 생겨났고 도둑과 갱도 많았습니다. 영화 [대부]의 '돈 코를레오네'가 활동하던 시기가 바로 이때입니다. 법보다 총이 먼저인 세상이었죠.




지금은? 자본주의의 정점에 있는 느낌입니다(아직도 정점에 오지 않았다면, 그래서 이런 식으로 한참을 더 가야 한다면 그야말로 절망입니다). 1950년대의 부자들과 비교할 수 없는 억만장자들이 명성과 인기까지 쓸어 담고 있습니다(돈 코를레오네는 돈과 권력만 가져갔던 것 같은데 말입니다). 모든 관심은 그들 만을 향해 있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그 반대 편에는 이름도 인기도 돈도 없는 저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퇴근하면 지쳐 쓰러지기 일쑤이고, 친구나 애인을 만나기 전에 통장 잔고를 계산해야 하는 평범한 사람들 말입니다.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이래 가지고는 아무것도 나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특별히 더 나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세상이 조금도 도와주지 않는 느낌이랄까요. 그래서인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돈보다 ‘낭만’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김렛을 마실 때면 필립 말로가 떠오릅니다. ‘낭만적인 필립 말로’가 말이죠.




‘테리’의 캐릭터도 나름의 매력이 있습니다.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는 말에 “나는 부자요. 돈이 이렇게 많은데 행복까지 바랄 필요가 있겠습니까?”라고 자조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 봐야 타락한 세상의 한 부분일 뿐이지만요. 그래서 돈 많은 테리가 필립 말로보다 나을까요? 일단 돈이 많아진 다음에 생각해보는 걸로 하지요!


두껍지만 레이먼드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을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김렛과 함께라면 그리 지겹지 않을 것입니다.


레시피

-      테리의 말처럼 진 반, 로즈 사의 라임주스 반을 섞은 맛은 모릅니다(궁금하긴 하지만요). 로즈라임 주스를 구하지 못했거든요. 이것이 영국 정통의 맛이라면, 전문 바에 가서 즐기시는 걸로!

-      저는 생라임을 사용했습니다. 힘껏 짜서 즙을 내주세요. 진과 라임주스는 1:1입니다.

-      제 취향은 여기서 끝인데, 신맛을 선호하지 않은 분은 설탕 1ts 넣는 것을 추천합니다.

1.     플라스틱 통에 얼음 적당히 채워주세요

2.     진 1잔, 라임주스 1잔 넣습니다. (여기서 ‘잔’은 소주잔입니다. 대강 50ml일 겁니다)

3.     7-10회 강렬하게 흔들어 주세요.

4.     얼음이 빠져나오지 않게 술을 따라 냅니다(그래서 선식용 플라스틱 통을 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얼음 부스러기를 잔에 떨어뜨리지 말아 주세요). 많이 흔들면 얼음이 녹아 술이 옅어집니다. 그러니 강하지 않게 즐기실 분들은 좀 많이 흔들어도 됩니다. ^^

5.     즐겨주세요. 김렛은 필립 말로와 함께.

6.     칵테일 북에 나온 레시피는 이렇습니다. 진 45ml, 라임주스 15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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