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보드카와 마주했던 순간을 기억합니다. 선배 집들이에 참석했을 때였는데, 앱솔루트 보드카가 테이블 위에 몇 병 올려져 있었습니다. 초록색 소주병이나 갈색 맥주병만 알고 있던 제 앞에 나타난 보드카 병의 디자인은 그야말로 ‘힙’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날 우리는 보드카를 특이하게도 맥주에 섞어서 마셨습니다. 말하자면 ‘보맥’으로 마신 겁니다. 소주의 도수가 20도 언저리인 것에 반해 보드카의 도수는 40도가 넘으니까, 그날 저녁 분위기가 어땠을지 짐작이 가시겠지요?
첫 만남이 그랬으니 당연히 보드카의 고향은 ‘스웨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투명한 듯 불투명한 외관은 마치 북유럽의 얼음처럼 차갑고 도도해 보였습니다. ‘보드카라면 북유럽 감성이지!’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나 보드카의 종주국은 러시아이거나 폴란드일 확률이 높습니다. 적어도 두 나라에서는 그렇다고 주장합니다.
보드카의 원료는 무엇을 상상하시든 그보다 더 다양합니다. 호밀과 같은 곡물, 옥수수부터 사탕무, 과일, 심지어 도토리로도 보트카를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그중 가장 질이 낮은 결과물을 얻게 되는 재료는 감자입니다. 19세기 초 폴란드에서 발간된 [완벽한 증류 업자와 양조업자]라는 소책자의 내용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감자의 고향은 페루입니다. 16세기 잉카 문명을 접한 스페인 사람들은 분명히 ‘감자’의 존재도 알았겠지만, 어떤 이유인지 외면해 버립니다. 식용 작물로서 유럽에 감자가 보급된 것은 17세기 후반입니다. 생으로 먹으면 독성이 있는 데다, 식민지 대륙을 고향으로 한 작물이다 보니 유럽인들에게 감자는 ‘노예에게 먹이는 음식’ 정도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건 귀족들이나 하는 생각이고, 18세기에 접어들면 농민들의 작물로 정착하게 됩니다. 일례로 영국이 식민지 아일랜드에서 생산되는 밀과 옥수수 등을 대부분 가져가 버렸을 때, 가난한 농민들이 주식으로 삼은 것은 감자였습니다. 19세기 중반 아일랜드에 감자 역병이 돌자, 인구의 1/4이 아사하거나, 굶주림을 피해 해외로 이주해야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18세기가 되면 동유럽 농민들에게도 감자는 주된 작물이 됩니다. 구하기 쉽고 값이 싼 재료에 양조업자들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폴란드에서는 감자를 원료로 한 보드카가 많이 만들어진 반면, 러시아에서는 호밀과 밀로 만든 보드카가 주를 이뤘습니다. 2차 세계 대전 중 곡물이 부족했던 미국에서도 감자를 원료로 한 보드카를 만들었다고 하니, 결과물이야 어떻든 감자는 널리 사용된 보드카의 재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재료로 만들어낸 보드카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무색’, 무취’라는 겁니다. 보드카의 재료가 다양한 이유는 어차피 증류 후 생산되는 술에서 맛이나 향이 나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미국은 버번위스키의 탄생지입니다만 현재는 버번위스키보다 보드카의 소비량이 앞서고 있다고 합니다. 향과 맛이 가미된 고급 보드카의 생산량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고 하니, 보트카의 특징으로 ‘무색, 무취’를 더 이상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참. 1월 31일은 ‘보드카의 날’입니다. 우리나라 명절은 아니고, 러시아에서 기념하는 날입니다. 추운 날씨 때문인지 러시아는 독한 술을 즐기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술과 관련된 옛날이야기를 하나 해보겠습니다. 10세기, 신생 러시아 왕국을 다스리던 블라디미르 대공은 자신의 백성에게 적합한 종교를 정해주기로 결심하고 각국의 사절들을 불러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유대교는 나라를 잃고 방황 중이라 탈락했습니다. 가장 솔깃했던 것은 하렘 같은 문화를 가진 이슬람교였습니다. 여느 권력자처럼 음주가무를 좋아하던 대공에게 ‘천상에서의 육체적 쾌락’ 같은 말을 꽤 그럴듯하게 전했겠지요. 대공은 거의 넘어갈 뻔합니다. 그러나 이슬람교가 술을 금한다는 이야기에 결단을 내립니다.
“음주는 러시아인의 낙이다. 우리는 그 낙 없이는 살지 못한다.”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러시아는 기독교 국가가 됩니다. 몹시 신뢰가 가는 이야기이지 않습니까? ㅎㅎ
오늘 소개해 드릴 칵테일은 ‘스크루 드라이버’입니다. 대개 가정에 기본적인 연장통은 하나씩 있죠? 칵테일 이름을 듣고 작은 망치나 니퍼 같은 것들 속에 함께 있는 ‘드라이버’가 떠올랐다면, 맞습니다. ‘스크루 드라이버’라는 말의 ‘드라이버’는 바로 거기서 유래된 말입니다.
이 칵테일은 이란에서 일하던 미국인이 작업 현장에서 처음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란이라면 이슬람 국가, 금주를 해야 하는 나라입니다. 그런 곳에서 일하던 미국인이 작열하는 태양 아래 작업을 하다 술이 몹시 마시고 싶어 졌던 겁니다. 술을 마시면서, 술을 마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짙은 색 주스에 섞어 마시는 방법을 떠올렸습니다. 그는 보드카와 얼음, 오렌지주스를 섞어 옆에 굴러다니던 드라이버로 휘저어 마셨고, 그래서 ‘스크루 드라이버’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