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도시를 여행하다

1.아테네와 베를린, 2주간의 여행

by 지안

역사 이야기 속, 눈에 들어오는 두 장면이 있다. 하나는 기원전, 다른 하나는 기원후에 벌어졌다.


먼저 기원적 449년. 아테네의 페리클레스는 지루하게 이어지던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을 마무리하는 의미로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와 강화조약을 맺는다. 한반도에 고조선이 있었을 무렵의 이야기다. 곰이 변한 웅녀를 어머니로 둔 단군 할아버지가 10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는 그 고조선 말이다. 당시 페르시아는 파키스탄 일부부터 중동 전역을 지나 이집트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영토를 통일한 제국이었던 반면, 그리스는 현재 그리스의 영토의 절반 정도에 500여 개의 도시국가로 헤쳐진 상태였다.


시오노 나나미가 쓴 [그리스인 이야기]에는 “주민은 그리스인이었다. 10명이 모이면 곧바로 두 파로 나뉘어 다툼을 벌이는 그 그리스인이었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몇 번을 읽어봐도 ‘그리스 인에 대한 긍정적 묘사’로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은 ‘페르시아의 침략’이라는 엄청난 사건 앞에서 잠시 다툼을 멈추고 연합했다. 약 50년간 이어진 전쟁의 최종 승자는 그리스였다. 그리스의 연합국 중에서 가장 많은 전쟁을 치른 국가도, 마침내 승리를 얻었을 때 제일 커다란 과실을 가져간 나라도 ‘아테네’였다.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는 길에 있는 아티쿠스 음악당에서는 지금도 연주회가 열린다


그리스는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 외에도 ‘소포클레스’와 ‘아리스토파네스’ 같은, 현재까지도 이따금 무대에 올려지는 작품을 쓴 극작가를 배출했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같은 철학자뿐 아니라 ‘투키디데스’와 같은 걸출한 역사가를 만들어 냈다. 고조선에 대한 역사적 자료가 턱없이 부족한 것과는 매우 다른 전개다.


영국의 역사가 H.D.F 키토는 아테네에 관해, “이 한 도시가 그리스와 유럽 문화에 끼친 기여는 너무나 놀라우며, 문명의 기준이 안락함과 신기한 물건이 아니라면, 기원전 480년부터 기원전 380년까지의 아테네는 분명 지금까지 존재한 사회 중 가장 문명화된 사회다.”라고 정리했다. 아테네에서 행해진 ‘민주주의’는 현대 국가들의 모델로 불리기도 한다. 즉 아테네는 현대인에게 기억할 만한, ‘바람직한’ 국가로 남아 있다.




다음 장면은 비교적 최근, 지금으로부터 75년 전에 일어났다.


1947년 2월 25일, 베를린의 연합국 점령국의 대표들은 ‘프로이센 주와 그 중앙 정부, 그리고 그 정부 기관’을 폐지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났고, 히틀러로 대표되는 나치는 퇴장했으며 베를린은 4개국에 의해 분할 통치되던 중에 벌어진 일이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국가가 생겨나고 사라졌지만, 이렇듯 법안으로 지워진 경우는 흔하지 않다. 프리드리히 대왕, 비스마르크로 대표되는 ‘프로이센 왕국’은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이후였지만, 바이마르 공화국을 지나 나타난 나치 독일이 프로이센의 승계를 전면에 내세웠기 때문이다.


베를린 프리드리히 대제의 동상

크리스토퍼 클라크는 그의 책 [강철 왕국 프로이센]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군국주의, 정복, 오만과 반자유, 폐지된 국가의 상징적 속성이 움직일 때마다 프로이센을 둘러싼 논쟁이 재차 피어오르곤 한다. 1991년 8월 상수시 궁에 있던 프리드리히 대왕의 유해를 이장하는 문제는 무척 까다로운 토론 주제였고, 베를린 한복판 슐로스 플라츠 호엔촐레른 궁을 복원하려는 계획은 공개적인 논쟁에 불을 지폈다.

2002년 2월, 그렇지 않았더라면 눈에 띄지 않았을 브란덴부르크 주정부의 사민당 소속 장관인 알빈 칠은 급작스럽게 악명을 얻었다 브란덴부르크 연방주와 베를린 시를 합병하자는 제안을 둘러싼 토론에 끼어들었던 것이다. 그는 ‘베를린 -브란덴부르크’는 길고 거추장스럽다면서, 새로 통합된 지역을 ‘프로이센’이라고 하면 왜 안 되냐고 물었다. 이는 토론의 새 물꼬를 텄다. 회의론자들은 프로이센의 부활을 경고했다. 독일 전역에서 텔레비전 토크쇼의 주제가 되었고,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프로이센은 허용되는가?’라는 제목으로 연재 기사를 실었다. 기고자 가운데 독일 특수 노선에 관한 대표적인 학자 한스 울리히 벨러 교수는 칠의 제안에 맹렬히 반대하며, ‘프로이센은 독이다’라는 제목을 달았다.

한마디로 프로이센은 기억에서 지워야 할 ‘바람직하지 못한’ 나라인 것이다. 2차 세계 대전을 겪은 세대는 아니지만 대강 어떤 기분으로 당시의 사람들이 프로이센을 바라봤는지는 짐작할 수 있다. 그리스의 심장이 ‘아테네’라면 프로이센의 중심은 ‘베를린’이었다.



시선을 잠시 과거의 베를린으로 돌려보자. 독일 내 작은 공국들 중 하나였던 뉘른베르크의 성주 프리드리히 폰 호엔촐레른은 1417년 당시 그곳을 다스리던 지기스문트 황제로부터 브란덴부르크를 구매하면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라는 직위를 얻게 된다. 이후 복잡하게 이어진 결혼 등으로 1603년 프로이센 공국에 대한 통치권을 손에 넣지만 통일된 형태는 아니었으며, 그저 몇 조각으로 떨어지고 분할된 영토가 늘어난 것에 지나지 않았다.


1618년부터 1648년 사이 발생한 30년 전쟁에는 덴마크와 스웨덴, 에스파냐와 네덜란드 공화국, 프랑스 등이 참전했지만, 정작 전투는 독일 땅에서 벌어졌다. 선제후에게는 변변한 군대가 없었고, 당연히 국경을 지킬 능력도 없었으며 결과적으로 백성들을 구할 수도 없었다. 농토는 황폐해졌고, 경제는 마비되었으며, 생활은 되돌릴 수 없을 만큼 파괴되었다. 힘없는 백성들로서는 목숨을 구하는 일만도 버거웠다. 전선이 바뀔 때마다 다른 군복을 입은 군인들에게 약탈당하고 강간당하고 살해당하는 일이 30년 동안 이어졌다. 중요한 도시들은 인구의 3분의 2 이상이 사라졌고, 사람의 자취가 완전히 사라진 소도시들도 몇 개씩 생겨났다고 한다.


베를린 시청

전쟁의 끝자락에 선제후가 된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군대 규모를 비약적으로 확대하고 사관학교를 설립하기도 하는 등 군제 개혁에 앞장선다. 이를 바탕으로 1655년부터 1660년까지 이어진 북방 전쟁에 가담해 영토를 넓히기 시작했고, 이후 프로이센이 사라질 때까지 군대 증강은 계속 이어진다.


1701년 1월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드디어 ‘프로이센 국왕’으로 즉위한다. 프로이센의 왕들은 군대에 집착했다. 열강들 속에 낀 약소국이 어떤 참혹한 상태에 놓일 수 있는지를 30년 전쟁에서 제대로 배웠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3세의 뒤를 이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평상시에도 군복을 즐겨 입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뒤를 이은, 우리에게는 프리드리히 대제로 알려진 프리드리히 2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런 전통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프로이센이 망하는 그날까지 이어진다.


강력한 왕권과 군대, 권위주의라는 말로 대표할 수 있는 것이 프로이센이었다. 끝없이 커지는 군대의 힘은 마침내 군부 독재와 비슷한 수준까지 팽창했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왕이었던 빌헬름 2세는 측근들이 숨기는 바람에 1918년 패전하는 시점까지 제대로 전쟁에 대한 상황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빌헬름 2세는 허수아비에 가까웠으며, 전쟁을 진두지휘한 것은 비대해진 군부였다. 패전 후 수립된 바이마르 공화국은 혼란을 바로잡을 힘이 없었다. 왕은 사라졌지만, 사회의 질서를 대신 잡아 줄 집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1930년 9월 선거를 통해 나치당이 독일 정치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아는 모든 비극은 이렇게 탄생했다.


전범 재판의 결과를 정리해 놓은 문서들


“아테네는 지금까지 존재한 사회 중 가장 문명화된 사회”라는 키토의 의견에 백 퍼센트 공감하는 바는 아니지만 아테네의 정치 형태는 분명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이었다. 지금과 같은 형태의 민주주의인가 하면 다른 의견을 몇십 개라도 붙일 수 있지만, 당시 전쟁을 벌였던 페르시아가 강력한 왕조 국가였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어느 정도 ‘민주적인 정치’를 했다고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엄연히 노예제가 있었고, 여자들은 투표권은커녕 외출조차 쉽지 않았지만 오늘날의 잣대로 과거를 재단하는 것은 곤란하다.


아테네와 베를린이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은 그들이 다른 민족이었기 때문일까? 그리스 내의 크고 작은 도시 국가들에서도 민주 정치제를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스파르타는 2명의 왕이 있는 형태였고, 오이디푸스 왕으로 유명한(물론 희곡 속의 인물이지만, 당시 정치 상황은 반영되었을 것이라고 판단해 볼 때) 테베도, 미궁으로 유명한 미노스도 왕정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아테네’라는 국가의 바람직한 모습은 그 정치형태에서 비롯되었던 것은 아닐까? 프로이센의 비극은 잘못된 정치 형태에서 어쩔 수 없이 나타난 현상은 아닐까?


베를린 장벽 공원 내 동독에서 탈출하려다 실패한 사람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궁금증이 생긴다면 찾아가 보는 것이 좋다. 물론 2500년 전에 사라진 국가를 지금 방문한다고 어떤 이야기를 찾게 될지는 알 수 없다. 지도상에서 완전히 지워진 나라에 대한 기억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직접 확인하기도 전에 실망할 수는 없다.


조금은 느슨해진 COVID-19의 방역을 느끼면서 아테네와 베를린을 여행하는 여정을 짜기 시작했다. 일단 떠나보면, 그곳에 도착하면 사소한 힌트라도 얻게 될지 모른다. 나의 여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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