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메시와 함께 한 여행

2. 아테네로 출발 : 기내 영화를 보다

by 지안

6월은 항공사 직원이 여행하기 나쁘지 않은 달이다(좋다는 말이 아니고 최악은 아니라는 말이다). 항공사 직원들이 저렴한 티켓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은 이제는 꽤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반만 맞다. 싼 항공권을 구할 수는 있지만 ‘대 전제’가 붙는다. 항공사는 기업이며, 기업의 목적은 ‘사원 복지’가 아닌 ‘최대 이윤’이다. 당연히 영업 부서는 최선을 다해 항공권을 판다. 그렇게 팔다 팔다 남은 좌석을 직원이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직원이 타지 않는다면 어차피 빈자리다. 당연히 예약도 되지 않고(보통은 공항에서 길게 목을 뺀 채 빈 좌석이 생기기만을 기다리다 출발 직전 뛰어 들어간다. 면세점 쇼핑은 해 본 지 오래다), 어떠한 보장도 없다.


운 좋게 빈 좌석이 생겨 용케 기내 좌석에 앉았다고 해도 안심할 수 없다. 세상 일에는 ‘크고 작은 사고’라는 것이 발생한다. 요즘은 그런 일이 많이 없지만, 전산망 상태가 좋지 않던 과거에는 같은 자리를 승객 두 명에게 내어주는 경우도 흔했다. 빈자리가 있다면 살짝 당황한 손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다른 좌석을 안내하면 되지만, 만석일 경우라면 도리가 없다. 같은 좌석에 둘이 앉을 수는 없으니, 누군가는 내려야 한다. 이런 경우 가장 먼저 찾는 것이 '직원 탑승자 명단'이다.


항공기 뒷좌석에 앉아 앞으로 펼쳐질 여행을 기대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던 직원은 졸지에 물벼락을 맞은 강아지처럼 비틀거리며 통로를 걸어 나오게 된다. 다른 승객들의 시선이 등에 꽂힌다.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진다.


혼자 여행 중 이런 일을 당했다면 오히려 감사하다. 한때는 ‘직원 복지’라는 이름으로 신혼여행도 이런 티켓을 내주었다(다행히 지금은 시정되어서 결혼 항공권만은 예약이 됩니다만). 달콤한 신혼여행을 끝내고 지친 몸으로 가족들에게 나눠 줄 선물을 가득 넣은 가방과 함께 항공기에 연결된 어두컴컴한 다리 속으로 내동댕이 쳐지면 아무리 성격 좋은 사람이라도 짜증이 차오른다.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분노는 옆 사람에게 향한다. 옳지 않다. 앞으로 살면서 싸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닐 텐데 이런 악몽까지 덤으로 주다니 상도에 어긋난다.




요즘에도 AV시스템에 문제가 생긴다거나 등받이나 팔걸이에 결함이 생겨 갑자기 팔 수 없는 좌석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이럴 경우에도 먼 곳에 앉아 꿈에 부풀어 있던 직원은 군말 없이 비행기에서 내려야 한다.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요즘은 직원들도 꼭 필요한 경우에는 (경조사 참석이라거나, 놓칠 수 없는 썸남썸녀를 보러 갈 때는) 제 값을 주고 표를 산다.


그리고 이런 빈도는 점점 늘어간다. 요즘은 정말이지 빈 좌석이 있는 비행기를 만나기가 어렵다.


하지만 직원도 사람인지라 끊임없이 꿈과 희망을 가지고 가능성에 도전한다. 가늘게 눈을 뜨고 예약이 차오르는 상황을 체크한다. 12월부터 2월, 7월부터 9월은 방학과 휴가가 이어지는 시기다. 당연히 직원들이 표를 구할 확률은 0에 수렴한다. 봄, 가을 같은 여행하기 좋은 계절에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일도 늘어난다. 마음을 다잡고 조용히 업무에 매진하는 편이 정신 건강에 좋다.


6월과 11월 즈음 표를 구할 확률이 조금 올라간다. 학생들의 기말고사가 있고, 학부모들의 애가 탈 때. 이 지긋지긋한 시간만 버티고 나면 곧 휴가를 가겠다고 벼르고 있는 그 타이밍이 항공사 직원에게는 가장 좋은 시기다. 판도라 상자에 담긴 마지막 희망이 상자 바깥으로 삐죽 고개를 내미는 것 같은 환상이 보인다. 원론적으로 그렇다는 말이지 이마저 꼭 맞는 말은 아니지만…….




그리하여 나의 여행도 6월로 결정되었다. 어제 반만 차 있던 예약 오늘 만석으로 바뀔 수도 있지만, 가만, 그렇다면 나는 집으로 돌아오지도 못할 것이고, 여행 다음날부터 해야 하는 출근에도 문제가 생기는….. 에이, 설마...... 나는 60퍼센트쯤 예약이 끝난 스케줄을 확인한 후, 과거의 사례에 비춰본다면 1,2주 사이에 크게 문제가 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세상 일이 다 그렇듯, 내 여행도 마음먹은 대로 풀리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아테네에 도착하기 위해, 먼저 프랑크푸르트로 향했다. COVID-19 이후 그리스와 가까운 이스탄불이나, 그보다는 조금 떨어진 두바이로 가는 비행기는 운항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프랑크푸르트까지 먼 길을 갔다 그리스까지 되돌아오는 여정을 선택했다. 드문드문 빈 좌석이 보이는 항공기에 앉아 부지런히 기내 영화를 검색했다.


불편한 좌석에서 조그만 화면으로 볼 영화라면 딱히 극장까지 갈 마음이 들지 않아서 혹은 내 돈 내고 보기는 아까워서 미뤄뒀던 것들이면 좋다. 차일피일 남겨둔 숙제를 마치는 것 같은 후련함과 함께 그만큼 줄어든 비행시간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작 영화 리스트에 [이터널스]가 있었다. 마블 영화는 '토르 시리즈’까지 다 챙겨봤지만, 어쩐지 이터널스는 보지 못했다. 무슨 줄거리인지는 모르지만 배우들은 전부 낯이 익다. 내가 왜 이걸 안 봤지? 뭔가 바쁜 일이 있었던 것이겠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영화를 보기 시작한 지 20분쯤 지난 후 과거의 내가 왜 이 영화를 보지 않았는지 기억해냈다. 신선함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이야기 구조 때문이다. 보지 않아도 마지막을 알 것 같은 기시감이 잔뜩 묻어 있는 영화였다.


이쯤 멈추고 다른 영화를 고를까 할 때쯤 마동석 배우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푸른 문을 배경으로 당당하게 서 있었다. 힘으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길가메시’가 그의 이름이었다. 게다가 여자 친구의 이름은 '테나; 그러니까 아테네 여신이다. 나는 잔뜩 구겨져 있던 자세를 바로잡았다. 조금 더 영화를 지켜보기로 했다. 이슈타르의 문을 배경으로 서 있는 길가메시를 그리스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만나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베를린을 방문하는 이유 중 하나는 페르가몬 박물관의 이슈타르의 문을 보기 위해서였다! 이건 어쩌면 나를 위한 영화인지도 몰라. 피곤한 정신이 멋대로 굴러가기 시작한다.


물론 이슈타르의 문은 길가메시의 시대보다 한참 후에 세워진 것이다. 하지만 지역을 대표하는 아이콘으로서 이슈타르의 문과 길가메시는 그야말로 어울리는 조합이다. 강남 빌딩 숲 사이를 갓을 쓰고 도포 자락을 날리며 전우치가 날아다녀도 별로 이상하지 않은 것과 같다.


오 오, 푸르고 멋진 저 문이 이슈타르의 문이다.


이슈타르의 문은 기원전 6세기경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 의해 지어진 성벽의 일부이다(기원전 6세기라면 우리는 여전히 고조선과 단군을 떠올려야 한다). 바빌론은 약 850헥타르의 크기로 서울의 상암동 정도의 면적에 약 10만 명의 인구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라크 지역에 위치한 이 도시는 산이나 바다와 같은 천연 방어벽 없이 평지에 우뚝 서 있었다. 도시 가운데로 유프라테스 강이 흘렀고 그 혜택을 받아 나무와 곡식이 풍성했다. 당연히 이 도시를 노리는 침략자는 많았고 높은 성벽이 필요했다.


네부카드네자르는 도시를 감싸는 2중의 벽을 두르고, 해자를 팠다. 남신이나 여신의 이름을 붙인 여덟 개의 문이 만들었는데, 그중 하나가 길가메시 뒤를 병풍처럼 받쳐주던 이슈타르의 문이다.


길가메시는 이슈타르의 문이 서 있던 지역의 오래된 신화 속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현재는 '실존인물이었다'는 쪽으로 연구자들의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학자들은 기원전 3천년기 초반, 수메르의 도시 중 우르크 제1 왕조의 다섯 번째 왕이 길가메시가 아닐까 하는 조심스러운 추측을 내놓는다.


흰색 표시가 바빌론의 위치다. 그 외에도 크고 작은 나라가 빼곡하다.


흔히 [길가메시 서사시]라 불리는, 길가메시에 관한 이야기를 짧게 옮겨 보자면 이렇다. 주인공 길가메시는 우루크의 왕으로 잘생긴 얼굴과 누구보다 멋지고 힘센 신체를 가진 인물이다. 대개 태생이 타고난 자들이 심성까지 곱기는 힘들다. 길가메시는 좋은 왕은 아니었으며, 특히 결혼하는 부부에게 ‘초야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좋게 말하면 상당한 폭군이었다.


참다못한 백성들이 신에게 탄원하자, 신은 길가메시와 비슷한 사람을 만들어 내려보낸다. 신들도 처음에는 가볍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전법을 사용한 것이다. 이렇게 세상에 온 사람의 이름은 ‘엔키두’. 털이 많고 거친 거인으로 사람보다는 동물에 가까운 형상이었고 실제로 동물들 속에서 살았다.


어느 날 사냥꾼이 멀리서 엔키두를 발견한 후 길가메시에게 보고한다. 엔키두 때문에 도무지 사냥을 할 수 없다며 어떻게 좀 해보라고 설득한다. 길가메시는 직접 엔키두를 잡으러 가는 대신 한 여자를 그에게 보낸다. 짐승 같은 엔키두를 유혹하여 교화시키라는 임무를 받은 여자는 왕의 미션을 훌륭하게 수행한다. 여자와 여섯 날, 일곱 밤 동안 사랑을 나눈 엔키두는 다시 원래의 무리로 돌아가려 했지만, 동물들이 달아나 버렸다. 동물들 입장에서는 이상한 냄새를 풍기는 친구 옆에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할 수 없이 여자를 따라 우르크로 들어온 엔키두는 왕이 어느 새신부를 먼저 차지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격분해서 길가메시와 결투를 벌인다. 막상 막하의 혈투 후 두 사람은 상대의 힘을 인정하고 친구가 되기로 한다. 어쩐지 중2병 같은 마무리다. 다행히 길가메시는 이제 초야권 같은 것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대신 괴물을 잡아 이름을 날리고 싶어진 길가메시는(말했잖나, 중2병) 멀리 떨어진 삼나무 숲에 사는 거인 후와와를 잡으러 가자고 엔키두를 꼬신다. 두 사람은 후와와와 만나지만 상대가 되지 못한다. 거의 죽을 뻔하던 두 사람은 ‘해의 신 샤마시’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승리를 한다. 이 모습을 바라보던 사랑의 신 이슈타르는 느닷없이 길가메시에게 사랑을 느낀다. 하지만 이슈타르 신의 과거 행적을 잘 알고 있던 길가메시는 신의 고백에도 냉담하게 돌아선다. 그냥 돌아서기만 했으면 됐을 것을 모욕하는 말도 몇 마디 남긴다. 이슈타르 신은 남편을 지옥에 버렸고, 아버지의 정원사를 개구리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 그런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은 신. 열받은 이슈타르는 하늘의 황소를 보내 우르크를 초토화시키고, 그 일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결국 엔키두는 죽게 된다. 엔키두의 죽음을 바라보며 비로소 자신도 죽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길가메시는 영생의 비밀을 찾아다닌다. 이곳저곳을 다니던 길가메시에게 바닷가 술집 여주인이 이렇게 말한다. 한번 들어보시라, 지금의 우리에게도 도움이 되는 이야기다.


밤낮 배를 채우고 즐겁게 사세요.
매일 잔치를 열고 밤낮 춤추며 즐기세요.
당신 손을 잡고 잇는 아이를 부드럽게 바라보고
당신을 껴안고 있는 아내를 행복하게 해 주세요.
이런 일은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에요.

메소포타미아 인들은 내세를 말하지 않는다. 지금, 여기서, 즐겁게 살라고 말한다. 그것만이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며, 달리 말하면 신도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하지만 이런 말을 듣고 길가메시가 깨달음을 얻는다면 이야기가 진전되지 않는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 위키피디아에서 펌.


길가메시는 여주인에게 우트나피슈팀을 만날 방법을 다그쳐 묻는다. 우트나피슈팀은 누구인가? 그는 메소포타미아 판 노아이다. 아니, 메소포타미아의 역사가 더 오래되었으니, 우트나피슈팀을 노아가 패러디한 것으로 보는 것이 맞다.


길가메시가 살던 시대보다 훨씬 오래전, 신들은 인간을 몰살시키기로 결정했다. 딱 하나 땅의 신 엔카만이 인간을 가엽게 여겨서 왕의 아들이었던 우트나피슈팀에게 그 사실을 살짝 알려주고, 배를 만들게 한다. 우트나피슈팀이 신의 말을 잘 수행했음은 물론이다. 그 상으로 우트나피슈팀과 그의 부인은 영원한 생명을 선물 받았고, 길가메시는 바로 그 선물의 정체가 궁금해 그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이야기에서 나와 잠시 곁길로 빠지자면, 성경 속 홍수는 타락한 인간들에게 내리는 형벌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 신화 속 이유는 단순하다. 그저 인간이 “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번성했기” 때문이다. 어쩌다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이누마 일루 아월름] 즉 '신들이 인간이었을 때'란 이야기 속에는 그 사연이 적혀있다. 이야기에 따르면, 인간이 없었을 때 땅 위에서 일을 한 것은 하급 신들이었다(그렇다! 신들에게도 계급이 있었다). 일이 너무 고됐기 때문에 하급 신들은 상급 신들에게 강력하게 항의하고 마침내 파업을 선언하게 된다. 그때 상급 신 중의 하나인 엔키가 하급 신을 대신해 노동할 인간을 만드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다. 물론 하급신들은 기뻐했다(그 힘든 노동을 대신하게 될 인간에 대해 생각해 준 신은 하나도 없었다. 세상이 다 그렇다). 여기서 우리는 홍수 때 엔키가 인간을 도와준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인간은 엔키의 작품이었다. 자신의 작품이 완전히 박살 나는 것을 두고 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여간 엔키는 인간들을 만든다. 남자와 여자를 만들고 아이를 낳게 만든다. 그리하여 이렇게 된다.

1200년이 흐르기도 전에
땅은 팽창하고 인구는 늘어났다.
땅은 황소처럼 울부짖었고……


현대와 같은 인구 폭발의 결과 하늘의 신 엔릴이 시끄러워 잠을 잘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전염병도 내려보고, 가뭄도 지나가게 해 봤지만 인구를 줄이는 데는 큰 효과가 없었다. 전쟁도 시켜봤겠으나 별로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에 빼 든 방법이 홍수였다. 물론 성공하지 못했다. 너무 현대처럼 보이는 과거다.




다시 길가메시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결국 길가메시는 우트나피슈팀을 만난다. 우트나피슈팀은 길가메시가 해저에서 자라는, 가시가 있는 어떤 풀(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는 것이 정상이다)을 손에 넣는다면 영원한 삶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해준다. 당장 길가메시는 바다로 뛰어든다. 무거운 돌을 발에 묶고 잠수해 마침내 그 풀을 손에 넣는다.


그리고는 중2병의 길가메시답게 돌아오는 길에 잠깐 한눈을 판다. 그 사이 뱀이 그 풀을 가지고 유유히 사라져 버린다. 이제 길가메시는 영원히 살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어떤가? 술집 여주인의 말처럼 현재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우리, 지금, 여기서 행복하자


그래서 아마도 [이터널스]의 길가메시는 만사를 제쳐두고 여자 친구인 테나와 함께 한적한 곳에 몸을 숨겼던 것일 게다. 옳거니. 그런데, 테나, 아테네, 이 여인에 대해서도 할 말이 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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